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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거상과 흑염소 중탕 『송도기이』
개성 송상 쉰 아홉 최 부자, 중풍으로 누우니 큰사위가 장부책을 빼돌리고 마름은 곳간 열쇠를 노린다. 십 년 단골 약재상 딸 서른 살 청상과부 송이가 흑염소에 황기·대추·마늘을 넣어 중탕한 보약을 백일간 올리니, 최 부자 입이 트이고 손이 움직여… 마침내 일어나 장부 점검하니 큰사위의 횡령 일목요연. 큰사위 무릎 꿇고 빌고, 최 부자 송이를 후처로 들여 가게를 맡기니 장사가 두 배로 번창한다. 첫 합궁은 송이가 "서방님 백일만 더 보양하시지요" 청하여 미루었다가 이루어지고, 최 부자 송이 품에서 "내 평생 돈을 모았어도 그대만 한 보물은 없네" 하더라.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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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조선 팔도 상권을 주름잡던 개성의 쉰아홉 최 부자. 하루아침에 중풍으로 쓰러지니, 믿었던 큰사위는 장부책을 훔치고 마름은 곳간 열쇠를 노립니다. 꼼짝 못 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때, 서른 살 청상과부 송이가 들고 온 '흑염소 중탕' 한 사발이 기적을 만들어내는데…! 돈보다 귀한 진짜 보물을 찾은 거상의 통쾌한 반전 로맨스, 지금 시작됩니다."
※ 1: 중풍으로 쓰러진 최 부자와 탐욕스러운 사위
예로부터 상술이 뛰어나기로는 개성 상인, 즉 송상(松商)을 으뜸으로 쳐주었습니다. 인삼과 포목을 떼어다 팔며 조선 팔도의 돈줄을 틀어쥐었던 개성 상인들 중에서도, 올해 쉰아홉을 맞이한 최 부자는 단연 독보적인 거상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등짐장수부터 시작하여 억척스럽게 재물을 모은 그는, 빈틈없는 셈과 날카로운 안목으로 거대한 상단을 일구어냈습니다. 수백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하루에도 수만 냥의 은전이 오가는 그의 대궐 같은 기와집은 개성부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지요. 그러나 하늘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영원히 허락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평생을 호랑이처럼 쩌렁쩌렁하게 호령하며 살았던 최 부자에게, 예고도 없는 무서운 불청객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찬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섣달그믐의 새벽이었습니다. 평소처럼 상단의 장부를 확인하기 위해 일찍 눈을 뜬 최 부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그만 벼락을 맞은 듯 방바닥으로 쿵 하고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으... 으어억..."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하고, 오른쪽 팔다리는 마치 거대한 무쇠 덩어리에 짓눌린 듯 단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처럼 혀가 뻣뻣하게 굳어 말소리조차 나오지 않았고, 입매는 기괴하게 한쪽으로 비틀려버렸습니다. 평생을 쉼 없이 달려온 거상에게 찾아온 무서운 병마, 바로 중풍이었습니다. 요란한 소리에 놀라 뛰어 들어온 하인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진 최 부자를 발견하고는 혼비백산하여 의원을 불렀으나, 진맥을 마친 개성 최고의 명의조차 무거운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습니다. 기의 흐름이 완전히 끊겨 손을 쓸 방도가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였습니다.
최 부자가 하루아침에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 눕자, 대궐 같던 기와집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고 음습하게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가장 먼저 흉악한 본색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최 부자의 큰사위였습니다. 본래 변변찮은 가문 출신이었으나 겉발림이 좋아 최 부자의 눈에 들어 맏사위가 된 자였습니다. 최 부자가 건강할 때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굽신거리던 큰사위는, 장인이 꼼짝달싹 못 하고 눈만 껌벅이는 신세가 되자 거칠 것이 없다는 듯 상단의 안방을 제 집처럼 차지했습니다.
어느 깊은 밤, 안방에 누워있는 최 부자의 귓가에 큰사위와 상단을 관리하던 늙은 마름의 은밀하고도 소름 끼치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집사, 어찌 되었는가? 영감탱이가 평생 숨겨두었던 진짜 알짜배기 장부책은 찾았는가? 송상들이 비밀리에 거래하는 인삼 밭의 위치와 청나라 상인들에게 받아둔 어음이 적힌 그 붉은 표지의 장부 말일세."
"예, 사위 어르신. 빙장어르신께서 침소 밑 비밀 금고에 숨겨둔 것을 제가 어제 빼내어 두었사옵니다. 여기 있사옵니다. 헌데, 이래도 되는 것인지요? 빙장어르신께서 아직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계신데..."
"허허, 이 사람아. 사람 구실을 해야 산 사람이지. 보게나, 똥오줌도 못 가리고 저리 침만 질질 흘리는 고깃덩어리가 어찌 대단한 최 부자란 말인가. 기껏해야 열흘 안에 숨이 끊어질 터. 그 전에 우리가 이 거대한 상단의 재물을 빼돌려 내 명의로 돌려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장부는 내가 가져갈 테니, 자네는 틈을 보아 곳간의 남은 열쇠 꾸러미를 모조리 빼내어 오게. 내가 상단의 주인이 되면 자네에게도 평생 먹고살 재물을 두둑이 챙겨주겠네."
그들의 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있던 최 부자의 속은 그야말로 시뻘건 화염이 일고 있었습니다.
'이런 천하의 짐승만도 못한 놈들! 내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피 같은 재산을 내 눈앞에서 버젓이 도둑질하려 들다니! 당장 일어나 저놈들의 목통을 베어버려야 하거늘, 어찌하여 내 몸은 이리도 말을 듣지 않는단 말인가! 원통하고 분하도다! 하늘이 정녕 나를 이리 비참하게 버리시는가!'
최 부자는 핏발 선 눈으로 큰사위를 노려보며 억지로 입을 떼어 호통을 치려 했으나, 비틀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우으으..." 하는 짐승의 앓는 소리뿐이었습니다. 큰사위는 최 부자의 침상 위로 다가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장인의 가슴팍을 툭툭 쳤습니다.
"장인어른, 어찌 이리 눈을 부라리십니까. 평생 돈만 좇아 사시느라 고생하셨으니, 이제 무거운 짐은 이 듬직한 사위에게 모두 맡기시고 편안히 저승길이나 준비하시지요. 껄껄껄."
눈앞에서 장부책을 챙겨 들고 방을 나서는 큰사위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울렸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거상 최 부자는 온몸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채, 자신의 피땀 어린 평생의 업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피눈물만을 쏟아내야 했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방 안에는 죽음의 그림자보다 더 깊은 절망만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 2: 청상과부 송이의 등장과 흑염소 중탕
최 부자가 쓰러진 지 보름이 넘어가자, 집안의 분위기는 이미 초상을 치르는 집이나 다름없어졌습니다. 큰사위는 하인들에게 장인의 약을 달이는 것도, 끼니를 챙기는 것도 대충 하라 이르며 노골적으로 죽기를 기다렸고, 최 부자의 방에는 퀴퀴한 냄새와 냉기만이 맴돌았습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갈증과 굶주림 속에서 꼼짝없이 숨을 거두는구나 체념하던 바로 그 무렵, 얼어붙은 최 부자의 안방 문을 조심스럽게 여는 이가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올해 서른 살이 된 청상과부 '송이'였습니다. 그녀는 최 부자 상단에 무려 십 년 넘게 최고급 약재를 납품해 오던 단골 약재상, 황 노인의 외동딸이었습니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홀로 아버지를 모시며 약방 일을 돕던 송이는,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체질과 약재의 궁합을 보는 눈이 당대의 명의 뺨칠 정도로 깊고 예리했습니다. 아버지가 병으로 누우시자 밀린 약재 대금을 정산받고 최 부자의 안부도 여쭐 겸 상단을 찾았던 송이는, 집안의 돌아가는 기괴한 꼴을 단번에 눈치채고 몰래 안방으로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어두운 방 안,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최 부자의 처참한 몰골을 마주한 송이의 맑은 눈동자에 짙은 안타까움이 서렸습니다. 과거, 아버지가 장사 밑천을 사기당해 길거리에 나앉을 뻔했을 때, 오직 아버지의 정직함만을 믿고 거금을 선뜻 내어주어 약재상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은인이 바로 저 최 부자였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그를 돈밖에 모르는 냉혹한 거상이라 욕했지만, 송이에게 그는 그 누구보다 은혜롭고 대인다운 사내였습니다.
'아아, 천하의 최 부자 어르신께서 어찌 이리 참혹한 몰골로 누워계신단 말인가. 방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입술은 바싹 타들어가 갈라지셨으니, 필시 몹쓸 핏줄들이 어르신을 외면하고 유산만 노리고 있음이 틀림없구나. 내 아버님의 은인이신 어르신을 이대로 돌아가시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손으로 어르신의 꽉 막힌 기혈을 뚫어놓고야 말리라!'
송이는 재빨리 소매를 걷어붙이고 방바닥의 먼지를 닦아낸 뒤, 차갑게 굳어버린 최 부자의 손발을 정성껏 주무르기 시작했습니다. 최 부자는 갑작스러운 여인의 등장과 따뜻한 손길에 놀라 눈을 크게 떴습니다. 송이는 다정한 목소리로 최 부자의 귓가에 속삭였습니다.
"어르신, 저 송이옵니다. 약재상 황 노인의 여식 송이옵니다. 놀라지 마시옵소서. 어르신께서 이리 되신 것은 생명이 다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세월 쌓인 피로가 찬 기운을 만나 핏길을 꽉 틀어막았기 때문이옵니다. 이 송이가 반드시 어르신을 일으켜 세워 드릴 터이니, 부디 마음을 강하게 다잡고 버티셔야 하옵니다."
송이의 굳건한 목소리에 최 부자의 얼어붙었던 가슴 한구석에서 희미한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송이는 그 길로 큰사위를 찾아가 단호하게 선언했습니다.
"사위 어르신, 제가 저희 아버님을 대신하여 최 부자 어르신의 병환을 치료해 보고자 하옵니다. 열흘만 제게 맡겨 주시지요."
속으로 콧방귀를 뀐 큰사위는 비웃음을 흘렸습니다.
'흥, 명의들도 포기한 노인네를 한낱 과부 계집이 어찌 살린단 말이냐. 어차피 죽을 목숨, 약값 핑계 대며 돈이나 뜯어내려는 수작이겠지. 맘대로 해보라지, 실패하면 약값은 커녕 문전박대를 해줄 터이니.'
큰사위의 허락 아닌 허락을 받아낸 송이는 곧장 산세가 험하기로 소문난 송악산 깊은 골짜기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산의 거친 정기를 먹고 자란 가장 튼튼하고 윤기가 흐르는 '흑염소' 한 마리를 구해왔습니다. 흑염소는 예로부터 죽어가는 사람의 양기를 북돋우고 굳어버린 핏줄을 뚫어주는 데 으뜸가는 영약이었습니다.
송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마솥 앞에서 불을 지폈습니다. 흑염소의 속을 깨끗이 비워낸 뒤, 기력을 보충하는 질 좋은 황기(黃芪)와 피를 맑게 하는 붉은 대추, 그리고 차가운 기운을 몰아내어 몸을 덥혀줄 통마늘을 아낌없이 뱃속에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 물을 단 한 방울도 섞지 않고 솥 안에 옹기를 넣어 수증기만으로 온종일 푹푹 쪄내는 '중탕(重湯)'을 시작한 것입니다.
사흘 밤낮 동안 장작불 앞에서 매운 연기를 뒤집어쓴 송이의 얼굴은 숯검정으로 얼룩졌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별빛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났습니다. 마침내 옹기 뚜껑을 열자, 진하고 검은 빛깔의 흑염소 진액이 구수하고 쌉싸름한 약재 향을 풍기며 그 묵직한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송이는 그 진액을 고운 천에 세 번이나 걸러내어 불순물을 없앤 뒤, 따뜻한 온기가 가시지 않은 사발을 들고 최 부자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르신, 이것은 막힌 혈을 뚫고 양기를 불어넣어 줄 흑염소 중탕이옵니다. 입을 벌리기 힘드시더라도 조금씩 삼켜보시옵소서."
송이는 은수저로 진하고 검은 흑염소 진액을 떠서 굳게 닫힌 최 부자의 비틀린 입술 사이로 조심스럽게 흘려 넣었습니다. 진액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최 부자는 뱃속에서부터 작은 화로를 피워놓은 듯한 뭉클하고 뜨거운 온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평생을 거친 상전에서 구르며 사람을 믿지 않았던 거상의 마른 눈가에서, 송이의 지극한 정성에 감복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베갯잇을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 3: 굳게 닫힌 거상의 입이 열리다
처음 송이가 흑염소 중탕을 들이밀었을 때만 해도, 큰사위와 상단의 하인들은 뒤에서 쑥덕거리며 비웃기 일쑤였습니다. 다 죽어가는 노인네에게 미련하게 약을 달여 먹인다며 송이를 구박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송이는 그들의 차가운 조롱과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예 최 부자의 안방 아랫목에 거처를 잡고 밤낮으로 최 부자의 곁을 지켰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산천에 파릇파릇한 봄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지만, 송이의 하루는 여전히 가마솥 앞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매일같이 신선한 흑염소를 다듬고, 황기와 대추, 마늘의 비율을 환자의 상태에 맞추어 세밀하게 조절하며 쉼 없이 중탕을 고아 냈습니다. 송이는 뻣뻣하게 굳은 최 부자의 팔다리를 끓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수백 번 닦아내고 주물렀으며, 한 방울의 약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우기도 일쑤였습니다.
최 부자의 내면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처음 한 달간은 그저 뱃속이 따뜻해지는 것에 불과했지만, 쉰 날이 넘어가자 얼음장 같았던 오른쪽 팔다리에 전기가 통하듯 찌릿찌릿한 감각이 미세하게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낫게 한 것은 흑염소의 약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버린 핏줄들 대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청상과부가 숯검정을 뒤집어쓰고 자신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헌신하는 모습. 그 숭고하고 따뜻한 온기가 꽁꽁 얼어붙어 있던 최 부자의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다시금 불태우게 만든 것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저리도 고생하는 이 여인을 보아서라도, 내 이대로 눈을 감을 수는 없다. 반드시 훌훌 털고 일어나 저 은혜를 갚고, 내 상단을 갉아먹는 그 쥐새끼 같은 놈들을 내 손으로 징벌하고야 말리라!'
최 부자는 송이가 약을 밀어 넣을 때마다 초인적인 힘을 다해 꿀꺽꿀꺽 삼켜냈고, 그녀가 주무를 때면 굳은 핏줄을 뚫어내기 위해 속으로 수만 번의 기합을 내질렀습니다.
그렇게 지극한 정성으로 약을 올린 지 어느덧 여든 날이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최 부자의 얼굴을 닦아주던 송이는 그만 들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기괴하게 한쪽으로 흉측하게 비틀려 있던 최 부자의 입매가 거짓말처럼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던 것입니다.
"어르신! 어르신, 얼굴이... 얼굴이 제자리를 찾으셨사옵니다!"
송이가 감격하여 소리치자, 최 부자는 자신의 의지대로 양 눈을 꽉 감았다 뜰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희망의 빛이 확실해진 순간이었습니다. 송이는 기쁨의 눈물을 훔치며 더욱 정성껏 흑염소 중탕을 달여 올렸고, 마침내 송이가 최 부자의 방에 들어온 지 백일 째 되는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그날은 큰사위가 상단의 이름으로 거대한 기생 연회를 열어 자신이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음을 선포하려던 날이었습니다. 안방 너머로 왁자지껄한 풍악 소리가 얄밉게 들려오던 그때, 송이가 평소처럼 달여 온 흑염소 중탕을 수저로 떠서 막 최 부자의 입가로 가져가려던 찰나였습니다.
"탁-!"
갑자기, 지난 백일 동안 쇳덩이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던 최 부자의 굵고 거친 오른쪽 손이 허공을 갈라 송이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습니다. 깜짝 놀란 송이가 흠칫하며 수저를 멈추자, 침상에 누워있던 최 부자가 우적우적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윗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습니다.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최 부자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강렬한 광채를 내뿜는 두 눈으로 멍하니 서 있는 송이를 깊고 애틋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백일 동안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굳게 닫힌 입술을 천천히 떼어, 낮지만 쩌렁쩌렁한 호랑이 같은 목소리를 방 안에 토해냈습니다.
"송이야... 네가... 이 늙은이를 살려내었구나."
막혔던 혀가 풀리고 온전히 트인 목소리였습니다. 그 굵직한 음성을 듣는 순간, 송이는 참고 있던 설움과 안도감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최 부자의 품에 무너져 내리듯 엎드려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흑흑... 어르신... 하늘이 도우셨습니다... 마침내 기운을 차리셨군요..."
최 부자는 떨리는 커다란 손으로 송이의 야윈 어깨를 토닥이며 꽉 끌어안았습니다. 자신을 구원한 이 아름답고 숭고한 여인. 피비린내 나는 상전(商戰)에서 평생 돈만을 좇아 살아왔던 쉰아홉의 늙은 거상의 차가운 가슴속에, 돈보다 훨씬 더 귀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마침내 깊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제 거짓된 자들을 향한 서슬 퍼런 심판과, 새로운 인생을 열어준 은인을 향한 거상의 위대한 보답이 시작될 참이었습니다.
※ 4: 장부를 펼쳐 든 최 부자의 서슬 퍼런 심판
백일간의 길고 끔찍했던 중풍의 깊은 수렁에서 마침내 깨어난 최 부자는, 마치 기나긴 동면에서 막 깨어난 거대한 호랑이처럼 기지개를 켜며 굳어있던 온몸의 뼈마디를 풀었습니다. 아직 젊은 시절의 완벽한 상태로 완전한 회복을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송이가 백일 밤낮으로 눈물과 땀을 섞어가며 고아 낸 흑염소 중탕의 신비한 약효와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 스스로의 힘으로 꼿꼿하게 걸음을 옮길 수 있을 만큼 놀랍게 기력을 되찾은 상태였습니다. 방 안에는 송이가 끓여온 탕약의 구수한 냄새가 맴돌고 있었지만, 굳게 닫힌 안방 문창호지 너머 밖에서는 여전히 큰사위가 상단의 이름으로 성대하게 열어젖힌 기생 연회의 왁자지껄한 풍악 소리와 방탕한 웃음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다 죽어가는 줄로만 알고, 슬퍼하기는커녕 상단의 재물을 빼돌려 잔치판을 벌인 저 금수만도 못한 것들을 생각하니 최 부자의 단전에서부터 뜨거운 분노가 용암처럼 끓어올랐습니다.
최 부자는 곁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송이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안심시킨 뒤, 안방 장롱 가장 깊숙한 곳을 열었습니다. 그곳에는 그가 과거 조선 팔도의 송상(松商)을 호령하는 대행수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입었던, 금실로 웅장한 호랑이 무늬가 수놓아진 위엄 있는 검은색 비단 도포가 고이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최 부자는 떨리는 손으로 그 도포를 꺼내어 어깨에 걸쳤습니다. 비록 백일 간의 투병으로 몸은 야위었으나, 도포를 걸친 그의 눈빛만큼은 수십 년 전 개성 바닥을 맨몸으로 평정하던 그 시절보다 훨씬 더 매섭고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송이야, 잠시 내 곁에서 이 늙은이의 부축을 좀 도와주겠느냐. 이제 이 집안에 낀 더러운 쥐새끼들을 내 손으로 직접 청소할 참이다."
송이의 조심스러운 부축을 받으며 안방 문을 왈칵 열고 밖으로 나선 최 부자가 묵직한 발걸음으로 넓은 대청마루 한가운데에 우뚝 섰습니다. 마당에서는 화려한 비단옷을 차려입은 기생들이 가야금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 평상에는 상단의 늙은 마름과 큰사위가 술에 만취하여 산해진미를 뜯어 먹으며 껄껄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방탕하고 역겨운 광경을 내려다보던 최 부자는 들고 있던 단단한 물푸레나무 지팡이로 대청마루 바닥을 쾅! 하고 내리치며 사자후를 토해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소란이냐! 내가 아직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숨을 쉬거늘, 상단 주인의 허락도 없이 감히 뉘 맘대로 곳간을 열고 이리 방탕한 짓거리를 버젓이 벌인단 말이냐!"
가을 서리처럼 차갑고 천둥처럼 쩌렁쩌렁한 호통 소리가 마당을 휩쓸자, 요란하게 울리던 가야금 소리와 기생들의 춤사위가 거짓말처럼 일제히 멈췄습니다. 마당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쥐죽은 듯 고요해졌고, 술에 취해 기생의 품에 안겨 히희낙락하던 큰사위와 마름은 대청마루에 우뚝 선 최 부자의 멀쩡한 모습을 보고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염라대왕을 마주한 듯 기겁을 하며 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귀신을 본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큰사위가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며 엎드려 더듬거렸습니다.
"자, 장... 장인어른! 어, 어찌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습니까요! 소, 소인은 그저... 장인어른의 병환이 하루빨리 쾌유하시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에, 백성들을 모아 작은 위로의 잔치를 열었을 뿐이옵니다..."
"닥쳐라, 이 금수만도 못한 천하의 몹쓸 놈아! 혓바닥에 기름을 바르고 감히 내 앞에서 능멸을 시도하려 드느냐! 네놈이 내가 꼼짝 못 하고 병석에 누워 숨이 넘어가길 매일 밤낮으로 저주하며 기다린 것을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내 침상 밑의 비밀 금고를 부수고 장부책을 훔쳐 간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최 부자는 곁에 대기하고 있던 충직한 수하들에게 불호령을 내려, 당장 큰사위의 거처와 늙은 마름의 방을 이 잡듯이 뒤져오라 명했습니다. 잠시 후 수하들이 마당으로 낑낑대며 들고 온 커다란 나무 궤짝을 부수자, 그 안에서는 큰사위가 그동안 최 부자의 눈을 피해 몰래 빼돌린 막대한 액수의 청나라 상인들의 어음과, 교묘하게 위조된 거래 장부들이 낙엽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 마름의 방 방바닥 밑에서는 상단의 알짜배기 재산이 보관된 비밀 곳간 열쇠 꾸러미가 무더기로 발견되었습니다. 빼도 박도 못할 명백한 배신과 횡령의 증거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분노로 온몸을 부르르 떨던 최 부자는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마당으로 성큼성큼 내려가, 흙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떠는 큰사위의 멱살을 억센 손으로 거머쥐고는 그의 뺨을 무자비하게 내리쳤습니다.
"내 평생을 바쳐 거두어 먹인 은혜를 이따위 원수로 갚는 더러운 놈! 네가 내 상단의 주인이 되려 얄팍한 수작을 부렸으나, 내 오랜 장사꾼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빼앗긴 장부를 훑어보니, 네놈이 청나라 밀매 상인들과 더러운 결탁을 하여 이자를 횡령하고, 내가 평생 일군 금산 인삼밭의 명의를 모조리 네놈 앞으로 돌려놓았더구나. 내 당장 네놈을 포도청에 넘겨 가산을 몰수하고 평생 차가운 감옥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게 할 것이나, 집에서 눈물짓고 있을 내 불쌍한 딸자식의 얼굴을 보아 이번 한 번만 목숨만은 살려두겠다! 당장 네놈이 입고 있는 비단옷을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내 집에서 당장 나가거라!"
최 부자의 추상같은 처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상단의 밥을 먹으며 은혜를 입고도 큰사위의 앞잡이 노릇을 한 늙은 마름에게는, 그동안 횡령한 재물을 이자까지 쳐서 모조리 토해내게 한 뒤 상단에서 영구히 추방하고 개성 땅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엄벌을 내렸습니다. 평생을 거친 상전에서 구르며 조선 팔도를 호령하던 거상의 무서운 진면목이 되살아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습니다. 상단의 위계질서를 단숨에 다시 엄격히 바로잡은 최 부자의 서슬 퍼런 심판에, 마당에 엎드린 수백 명의 하인들과 기생들은 그 누구도 감히 불만을 품거나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습니다.
마당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용서를 구하던 큰사위와 마름이 수하들에게 질질 끌려 대문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광경을 지켜보며, 최 부자는 깊고도 쓸쓸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돈과 권력 앞에서는 피를 나눈 가족조차 한없이 추악하고 비열해지는 인간의 얄팍한 본성에 깊은 환멸과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너져 내리던 그의 거칠고 차가워진 시선이, 조용히 대청마루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지켜보던 송이에게 머무는 순간이었습니다. 거짓말처럼 분노로 끓어오르던 마음이 가라앉고 따뜻하고 평온한 기운이 그의 텅 빈 가슴을 훈훈하게 채우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매정하게 배신한 가짜 핏줄들이 떠난 쓸쓸한 빈자리에,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이 늙은이를 살려낸 세상에서 가장 진실된 진짜 보물이 묵묵히 서 있었던 것입니다.
※ 5: 가게를 물려받은 송이와 번창하는 상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어지러운 난동을 말끔히 정리하고 배신자들을 처단한 최 부자는, 며칠 뒤 개성부의 내로라하는 주요 객주 상인들과 자신의 상단을 이끄는 핵심 도집사들을 모두 으리으리한 안방 대청으로 불러모았습니다. 방 안에는 최 부자의 부활을 축하하면서도, 혹여나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긴장한 상인들의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최 부자는 헛기침을 하여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뒤, 상석에 앉아 그들 앞에서 그 누구도 감히 예상치 못한 파격적이고도 놀라운 선언을 하였습니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내 평생을 쉼 없이 거친 장사판에서 구르며 억만금의 돈을 모았으나, 내가 병석에 누워 죽을 고비를 넘길 때 그 숱한 돈과 재물이 내 목숨을 단 하루도 연장해주지는 못하였다. 내가 중풍으로 쓰러져 똥오줌을 못 가리고 있을 때 곁을 묵묵히 지키며, 백일 밤낮으로 매운 연기를 마셔가며 나를 기적처럼 살려낸 이는 내 피붙이도 아니요, 여기 있는 약재상 황 노인의 여식 송이뿐이다. 나는 오늘부로 이 은혜롭고 지혜로운 여인을 나의 정식 후처(後妻)로 맞이하여 내 남은 여생을 함께할 것이다!"
수십 년을 홀로 억척스럽게 살아온 깐깐한 늙은 거상의 폭탄선언에 좌중은 크게 술렁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최 부자의 결정에 반대하거나 토를 달 명분은 없었습니다. 송이가 숯검정을 뒤집어쓰고 흑염소 중탕을 끓이며 지극한 정성으로 최 부자를 간호했다는 눈물겨운 미담은, 이미 개성 바닥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발표에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당사자인 송이였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얼굴을 복숭아처럼 붉히며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습니다.
"어, 어르신! 당치도 않사옵니다. 저는 그저 과거 저희 아버님이 빚더미에 앉아 거리에 나앉을 뻔했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큰돈을 내어주신 어르신의 그 크신 은혜를 갚았을 뿐입니다. 어찌 저 같이 부족하고 천한 과부 여편네가 개성 제일가는 어르신의 곁에 감히 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약재상으로 돌아가 아버님을 모시는 것으로 족하옵니다."
그러나 최 부자는 굳은 의지가 담긴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가 송이의 두 손을 굳게 맞잡았습니다. 그리고 만인 앞에서 단호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송이야, 내 목숨의 절반은 이미 네가 준 것이니, 내 남은 생애는 오롯이 너를 위해 쓸 것이다. 그리고 오늘 상인들을 모아놓고 선포할 것이 또 하나 있다. 내 거대한 상단 중에서도 가장 이문이 크고 중요한 인삼과 약재를 다루는 알짜배기 상권을 모조리 너에게 물려주어, 개성 상단의 대행수(大行首)로 임명할 것이다. 너의 그 약재를 다루는 뛰어난 안목과 사람을 살리는 착하고 굳은 심성이라면, 분명 늙고 낡은 방식에 갇힌 나보다 백 배, 천 배 더 훌륭하고 크게 장사를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야."
철저한 남성 중심의 조선 시대 상업계에서, 그것도 과부 출신의 여인을 거대 상단의 수장으로 앉히는 것은 그야말로 건국 이래 유례가 없는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몇몇 늙은 도집사들이 여인이 어찌 거친 상단을 이끄냐며 난색을 표하려 했으나, 최 부자의 서슬 퍼런 눈빛 한 번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최 부자의 혜안과 통찰력은 이번에도 결코 틀리지 않았습니다. 가게의 전권을 물려받은 송이는 최 부자의 든든하고 거대한 재력을 뒷받침 삼아, 특유의 성실함과 지혜로움을 맘껏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송이는 과거 최 부자나 큰사위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이문을 남기는 데만 급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과거 아버지가 가르쳐준 대로 속임수 없는 정직한 최상급 약재만을 취급하였고, 산지에서 약초를 캐는 심마니들에게도 제값을 넉넉히 쳐주어 질 좋은 물건을 싹쓸이하다시피 확보했습니다. 또한 전국에 지독한 흉년이나 역병이 돌면, 이문을 포기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원가로 약재를 나누어주거나 무료로 구휼을 베풀며 하늘 같은 신용과 칭송을 차곡차곡 쌓아갔습니다.
오직 돈벌이에만 매몰되어 피도 눈물도 없이 차가웠던 최 부자의 거대 상단은, 송이의 따뜻하고 헌신적인 경영 철학이 더해지면서 그 명성이 조선 팔도를 넘어 바다 건너 청나라 황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불과 일 년 남짓한 시간 만에 상단의 규모와 수익은 오히려 큰사위가 있던 시절보다 두 배, 세 배로 눈부시게 번창하였고, 개성 사람들은 최 부자가 사람과 약재 보는 눈 하나는 참으로 귀신같다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혀를 내두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호랑이처럼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남편과, 지혜롭고 억척스러운 아내로서 완벽한 찰떡궁합을 자랑하며 상단을 무섭게 이끌어가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지고 밤이 되어 고즈넉한 안방에 단둘만 남게 되면, 쉰아홉의 백전노장 최 부자는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슴 뛰는 설레는 연정에 휩싸여, 마치 첫사랑에 흠뻑 빠진 열여섯 소년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송이의 눈치만 살피곤 했습니다. 등잔불 아래서 가계부를 정리하는 송이의 단아한 옆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깊은 눈빛에는, 단순한 생명의 은인에 대한 고마움을 훌쩍 뛰어넘어, 한 여인을 향한 깊고도 뜨거운 맹목적인 사랑이 남몰래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 6: 백일의 기다림 끝에 찾아온 첫 합궁
최 부자와 송이가 온 개성 사람들의 축복 속에 정식으로 부부의 굳은 연을 맺고 같은 안방을 쓰게 된 지도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몇 달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부부로서 마땅히 살을 섞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최 부자는 아직 송이의 고운 몸에 손가락 하나 제대로 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를 너무나 아끼고 깨질 듯 귀하게 여기는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풍을 앓고 난 자신의 늙고 쇠약한 몸뚱어리가 한창 꽃다운 나이인 서른 살의 그녀에게 끔찍한 짐이 되거나 실망을 안겨줄까 두려워, 매일 밤 홀로 가슴만 쥐어뜯으며 벙어리냉가슴 앓듯 애를 태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유난히도 달이 밝고 밤공기가 포근하던 봄밤이었습니다. 며칠을 망설이던 최 부자는 마침내 굳은 용기를 내어, 비단 이부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던 송이의 곁에 조심스레 다가가 누웠습니다.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은은한 달빛에 비친 송이의 하얗고 고운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 부자가, 거칠고 떨리는 손을 조심스레 뻗어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깊은 한숨과 함께 속삭였습니다.
"송이야... 네가 들으면 주책맞다 비웃을지 모르겠으나, 내가 비록 내일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늙고 병든 노인네이나, 너를 향해 뛰는 내 가슴속 마음만큼은 이팔청춘 젊은 사내 못지않게 뜨겁고 간절하단다. 허나... 네가 아직 이 늙고 볼품없는 사내의 곁이 불편하고 꺼려진다면, 내 평생토록 네 고운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저 이렇게 바라만 보며 지켜줄 것이다. 네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으니 말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조심스럽게 꺼낸 진심 어린 투박한 고백에, 고르게 숨을 쉬며 눈을 감고 있던 송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최 부자의 눈을 깊이 마주 보았습니다. 그녀의 맑고 깊은 눈동자에는 조금의 동정이나 거부감도 없는, 지극히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가 번져 있었습니다. 송이는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로 최 부자의 주름진 거친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맑은 목소리로 화답했습니다.
"서방님, 어찌 그리 스스로를 낮추시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서방님은 제게 하늘 같은 생명의 은인이시자, 험한 세상에서 제가 평생을 믿고 기대어 쉴 수 있는 가장 든든하고 거대한 태산이시옵니다. 제 몸과 마음 역시 이미 오래전부터 오롯이 서방님을 향해 열려 있사옵니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송이의 벅찬 대답에 최 부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차올라, 당장이라도 그녀를 으스러지게 품에 안으려던 찰나였습니다. 송이가 갑자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양손으로 최 부자의 넓은 가슴을 살짝 밀어냈습니다.
"허나, 오늘 밤은 아니 되옵니다, 서방님. 조금 더 참으셔야 하옵니다."
"어, 어찌하여 그러느냐? 내가 방금 전 무언가 큰 실수라도 한 것이냐? 아니면 마음이 바뀐 게야?"
당황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절부절못하는 최 부자에게, 송이는 방 한구석 화로 위에서 쌉싸름한 냄새를 풍기며 보글보글 끓고 있는 약탕기를 가리키며 나직하고 단호하게 속삭였습니다.
"서방님께서 죽을 고비인 중풍에서 깨어나신 지 아직 반년밖에 되지 않으셨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셔도, 사내로서의 양기를 완전히 뿌리부터 회복하시려면 제가 매일 정성껏 지어 올리는 저 특별한 '흑염소 중탕'을 앞으로 딱 '백일'만 더 드시며 철저하게 보양을 하셔야만 하옵니다. 백일의 정성이 온전히 채워져 뼛속까지 기력이 차오르는 그날 밤, 제가 기꺼이 서방님의 품에 온전히 안기겠사옵니다. 약조하시겠습니까?"
최 부자는 처음에는 당장 눈앞의 아내를 품지 못해 애가 타서 입을 삐죽이며 툴툴거렸으나, 자신의 떨어진 건강을 그 누구보다 살뜰하고 과학적으로 챙기는 어린 아내의 깊고 따뜻한 사랑 앞에서는 도저히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소년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송이의 조건에 고개를 크게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밤부터 개성 제일의 거상 최 부자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애타는 '백일 카운트다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송이는 약속대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질 좋은 기력 보충제인 황기와 붉은 대추, 마늘을 흑염소와 함께 듬뿍 넣고 고아낸 진득한 흑염소 중탕을 달여 바쳤습니다. 평소 같으면 쓰다고 인상을 구길 법도 하건만, 최 부자는 그 검고 쓴 약을 마치 달콤한 꿀물을 마시듯 달게 단숨에 들이켜며 씩씩하게 기력을 무섭게 보충해 나갔습니다. 서재에 걸린 달력에 매일같이 하루하루 붉은 붓으로 먹표를 지워나가는 최 부자의 표정은 천하의 금은보화를 다 가진 듯 헤벌쭉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애타는 백일째 되는 날 밤이 찾아왔습니다. 은은한 모란 향촛불이 방 안을 붉게 물들이며 타오르는 안방에서, 송이는 평소의 수수한 옷차림을 벗고 옥비녀를 꽂아 곱게 단장을 한 채 수줍고도 고운 얼굴로 마침내 최 부자의 단단한 품에 사뿐히 안겼습니다. 백일 간의 흑염소 보양 덕분에 놀랍게도 젊은 시절의 펄펄 끓는 혈기와 활력을 온전히 되찾은 최 부자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다정하게,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석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송이를 품어 안았습니다. 서로의 따뜻한 체온이 깊숙이 녹아들며, 기나긴 병마의 시련과 백일의 애타는 인내 끝에 맺어진 두 사람의 첫 합궁은 그 어떤 젊은 연인의 밤보다 황홀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깊어갔습니다.
이튿날, 맑은 아침 햇살이 창호지를 환하게 비추고 방 안을 밝힐 무렵, 최 부자는 일찍 잠에서 깨어 자신의 듬직한 품에 안겨 새근새근 평온하게 잠든 송이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습니다.
"내 평생을 바쳐 거친 세상을 누비며 억만금을 모으고, 천하의 진귀하다는 보물은 다 내 손에 쥐어보았건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구나. 다 늙고 병들어 버려진 나를 거두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이토록 뜨거운 사랑을 안겨준 그대야말로, 내 인생에서 찾은 최고의 진짜 보물이로구나. 내 남은 평생, 내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오직 그대만을 애지중지 아끼고 섬기며 살 것이네."
돈에 미쳐 가족도 버리던 차가운 거상의 거친 가슴을 완벽하게 녹여버린 청상과부의 흑염소 중탕 한 사발. 한때 돈과 탐욕으로 얼룩져 무너질 뻔했던 거대한 상단은 이제 두 사람의 굳건한 신뢰와 헌신적인 사랑 속에서 더욱 단단하고 따뜻하게 번창해 나갔고, 이 아름답고도 통쾌한 개성 거상의 늦깎이 회춘 로맨스는 오랫동안 조선 팔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가장 훈훈하고 부러운 전설로 오래도록 남게 되었더랍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들려드린 개성 거상과 흑염소 중탕 이야기, 어떠셨나요? 돈이면 다 될 줄 알았던 최 부자가 병에 걸리고 나서야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과정이 참으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시커먼 흑염소 중탕 속에 담긴 송이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그 마음을 알아보고 전 재산을 맡긴 최 부자의 결단이 결국 기적을 만들어냈네요. 우리 인생에서 진짜 귀한 보물은 통장 잔고가 아니라, 내 곁을 진심으로 지켜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꾹 눌러주시고, 다음에도 가슴 따뜻해지는 재미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