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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야담 - 한양 최대 객주 어른과 청에서 온 침술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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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예순 해를 바쳐 한양 최대의 상단을 일군 대객주 홍만석. 전신 마비로 쓰러진 그의 병상 너머로 자식들은 곳간 열쇠를 훔치기 바쁩니다. 배신감 속에 산송장처럼 누워 죽음만을 기다리던 어느 눈 내리는 날, 삼십 년 전 목숨을 빚진 청나라의 젊은 침술녀가 그를 찾아오며 모든 운명이 뒤바뀌기 시작합니다.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불태우는 아찔한 화침, 그리고 핏빛 복수가 지금 펼쳐집니다!
※ 1단계
경신년 시월, 한양 종로 육의전 뒷골목은 새벽 인시부터 짐수레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로 지독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삼남 지방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올라온 낟알 굵은 쌀섬이 산맥처럼 끝없이 쌓이고, 아득한 의주 국경을 넘어온 형형색색의 비단 궤짝들이 첫눈의 눈송이처럼 어지럽게 흩날리는 그 번화한 거리. 도성의 백성들은 그 골목의 본래 이름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고, 그저 그곳을 "만석골"이라 불렀다. 대객주 홍만석. 열넷이라는 어린 나이에 봇짐 하나 달랑 메고 등짐장수로 바닥부터 시작해, 장장 예순 해 만에 한양으로 흘러드는 모든 물목의 절반을 억센 손아귀에 쥐어버린 전설적인 사내. 그의 이름 석 자가 곧 골목의 이름이 되고 법이 된 것이다.
그의 소유로 된 곡물 창고만 열두 채요, 짭조름한 바다 냄새를 풍기는 어물 창고가 여섯 채,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는 포목 창고가 아홉 채에 달했다. 과장이 아니라, 그가 기침 한 번 크게 하면 도성 안의 쌀값이 하루아침에 두 푼이나 널을 뛰었고, 그가 호탕하게 웃으면 평안도 상단의 행수들이 기루를 통째로 빌려 밤새워 축배의 술을 마셔댔다. 한양 상권의 심장 그 자체인 사내. 그러나 그 화려하고 시끄러운 거리의 정중앙, 가장 높고 웅장한 기와집의 가장 깊숙한 안방에는 짙은 어둠과 적막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최고급 비단 이불 아래 미동조차 없이 누운 노인은 제 손가락 하나조차 마음대로 까딱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사흘째 방구석에 밀려 있는 귀한 녹용과 인삼을 달인 약사발은 이미 차갑게 식어 검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노인은 그저 퀭한 눈만 겨우 뜬 채, 천장을 가로지르는 굵은 서까래에 박힌 옹이 자국 일곱 개를 세고, 또 세고, 다시 처음부터 세는 것으로 하루의 전부를 견뎌내고 있었다. 낡은 창호지 문틈으로 칼날 같은 초겨울 바람이 새어 들어와 탁자 위의 등잔불이 위태롭게 흔들릴 때마다, 길쭉한 그림자가 노인의 창백하고 주름진 얼굴 위를 유령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그 그림자가 살아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이미 숨이 끊어진 송장인지를 집요하게 묻는 듯했다.
방 안의 고요함과는 대조적으로 널찍한 마당에서는 아침부터 아들들이 목청을 높여 다투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아비의 목구멍으로 넘길 부드러운 죽을 쑤라는 다급한 외침도, 장안에서 제일가는 명의를 속히 모셔 오라는 효심 어린 소리도 결코 아니었다.
"그 창고 장부는 기필코 내 방으로 옮겨야 한대도! 아버님이 쓰러지시기 전에 분명 내게 일임하셨다!"
그것은 거대한 부를 쥐고 있던 권력자가 쓰러지자마자, 남아있는 이권과 장부를 어느 방으로 먼저 빼돌릴 것인지를 두고 벌이는 짐승들의 이전투구였다. 숨 한 번 편히 쉬지 못하고 일만 하며 예순 해를 벌어 쌓아 올린 만석꾼의 장엄한 아침이, 방 안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끔찍하게 고독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그렇게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 2단계
건장한 체격을 가진 큰아들 판술이 굳게 닫혀 있던 안방 문턱을 쿵 소리가 나게 넘어 들어온 것은, 해가 이미 중천에 떠올라 창호지가 환해진 뒤였다. 아비의 병환을 살피는 문안 인사랍시고 성의 없이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으나, 그의 탐욕스러운 눈길은 병색이 완연한 아비의 핼쑥한 얼굴이 아니라 머리맡에 놓인 묵직한 옻칠 궤짝에 노골적으로 붙박여 있었다. 그 궤짝 안에는 홍만석이 평생을 바쳐 일군 모든 부의 상징, 곳간 열쇠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아버님, 요즘 아랫것들이 하도 기강이 해이해져서 말입니다. 곳간 열쇠는 소자가 장남으로서 잠시 맡아두어 단속을 엄히 하겠습니다. 행수들도 자꾸 결재를 미룬다며 제게 물어와서 도리가 없습니다요."
노인은 입을 벌려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중풍으로 굳어버린 혀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져 입 밖으로 단 한 마디의 말도 뱉어내지 못했다. 분노와 허탈감이 뒤섞인 감정에 그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두 번 깜박였을 뿐인데, 판술은 그것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한 승낙으로 읽어버렸다. 아니, 애초에 아비의 뜻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자신이 읽고 싶은 대로, 빼앗고 싶은 대로 명분을 만들었을 뿐이다. 기다렸다는 듯 궤짝을 열어젖힌 판술의 손에서, 열쇠 꾸러미가 서로 부딪히며 내는 날카롭고 섬뜩한 쇳소리가 방 안을 한 바퀴 빙 돌더니 이내 문밖으로 미련 없이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홀로 남겨진 그날 밤, 텅 빈 궤짝을 바라보며 노인은 생전 처음으로 치열했던 제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처절하게 셈해보았다. 예순 해라는 억겁 같은 시간 동안 그가 종교처럼 맹신했던 진리는 단 하나였다. 곳간이 가득하면 자연스레 고개 숙인 사람이 모이고, 재물이 쌓이면 혈육의 정 또한 덩달아 두터워질 것이라는 확신. 실제로 겉보기에는 늘 그래왔다. 미어터지게 곳간이 차오르니 남부럽지 않은 늠름한 아들이 셋이나 생겼고, 세도가의 사위가 둘이나 줄을 섰으며, 충성을 맹세하는 유능한 행수 스물이 구름 떼처럼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런데 이제 육신이 무너져 병석에 누워 비로소 진실을 마주하니, 예순 해 동안 그의 곁에 모인 것은 체온을 가진 따뜻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돈 냄새를 맡고 몰려든 사람의 모양을 한 탐욕스러운 그림자들뿐이었다. 그들이 애타게 모여 서성이던 자리는 병든 아비의 쓸쓸한 머리맡이 아니라, 황금이 쌓인 굳건한 곳간 문 앞이었다. 문득 마흔 해 전, 주막에서 막걸리를 들이켜던 어느 눈먼 노장사꾼이 술김에 툭 흘리듯 던졌던 말이 선명한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
'자네, 재물은 틀림없이 사람을 꼬이게 부르지만 말이야. 그렇게 돈 보고 부름 받은 사람이 껍데기까지 전부 진짜 사람은 아니여. 그걸 잊지 말게나.'
그때는 그저 실패한 늙은이의 알량한 푸념이라 치부하며 코웃음을 치고 넘겼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을 비웃던 제 입술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숨을 쉬고 있으면서도, 산 채로 무덤에 갇혀 문상을 받는 기분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노인은 처음으로 허무하게 흩어져버릴 제 남은 목숨이 아니라, 단 한 번도 사람의 온기를 챙기지 못하고 악착같이 일만 하다 끝난 자신의 예순 해 인생 전체가 미치도록 아까워져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 3단계
대객주 홍만석에게는 남들이 보기엔 부러울 것 없는 아들 셋과 금지옥엽 딸 하나가 있었다. 권력욕이 강하고 셈이 빠른 큰아들 판술은 가장 규모가 큰 곡물 창고 전체를 통솔했고, 성정이 교활한 둘째 판구는 마포 일대의 어물 창고를, 주색잡기에 능한 막내 판돌은 화려한 포목 창고를 나누어 맡고 있었다. 유일한 혈육인 딸 아지는 일찌감치 남촌의 뼈대 있는 무관 집안으로 시집을 가버린 탓에, 반년에 한 번 명절에나 겨우 친정 대문 문턱을 밟는 형편이었다. 거기에 더해 수석 행수 최두칠은 스물다섯 해라는 긴 세월 동안 엎드려 홍만석의 곁에서 핵심 장부를 잡고 살림을 관리해 온, 그의 수족과도 같은 사내였다.
강철 같던 노인이 벼락처럼 쓰러진 것은 일 년 중 상단이 가장 바삐 돌아가는 추석 대목을 고작 닷새 앞둔 깊은 밤이었다. 태어나 지금까지 감기 한 번 심하게 앓아본 적 없던 장대한 몸이, 마치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한순간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처음에는 식사를 하던 오른팔이 툭 떨어지며 마비가 오더니, 다음 날 아침 동이 틀 무렵에는 두 다리의 감각마저 완벽하게 끊어지며 그를 침상에 산송장처럼 묶어버렸다.
가장이 쓰러진 처음 이레 동안은 자식들도 행수들도 하늘이 무너진 듯 대성통곡을 하며 안방을 지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확히 열흘이 지나자 의무적인 통곡은 점차 귀찮음을 담은 깊은 한숨으로 바뀌어갔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에는 그 형식적인 한숨마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해가 지고 밤이 이슥해지면, 은밀하게 뒷문으로 낯선 대장장이가 불려 들어와 대문간을 드나들었다. 쇳물 냄새를 풍기며 진짜 열쇠를 본떠 가짜 열쇠를 몰래 깎아내는 소리가 어둠을 틈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충직함을 자랑하던 최두칠은 안방의 눈치를 보며 장부에 적힌 숫자를 교묘하게 한 자리씩 지우고 고쳐 적기 시작했고, 둘째 판구는 어물 창고에 보관된 최고급 명태 삼백 동을 슬그머니 수레에 실어 제 처가댁 곳간으로 빼돌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살리기 위해 정성껏 다려 올리던 명약은 어느새 핑계를 대며 하루 세 번에서 한 번으로 줄어들었고, 병실의 온기마저 차갑게 식어갔다. 오직 어릴 적 거두어들여 잔심부름을 하던 앳된 계집종 삼월이만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어와 뻣뻣하게 굳어가는 노인의 거친 손가락을 제 작은 손으로 꾹꾹 주물러 주었다.
"어르신, 오늘은 어제보다 손끝이 조금 더 따뜻하시네요. 곧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실 겝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건네는 그 작고 따뜻한 말 한마디. 그것만이 전신이 마비된 채 굶주려가는 노인이 유일하게 하루를 미치지 않고 견뎌낼 수 있게 해주는 영혼의 밥이었다. 한양 땅을 쥐락펴락하는 거대한 만석꾼의 집에서 가장 지독하게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곳간 열쇠를 예순 해나 거머쥐고 호령했던 홍만석 그 자신이었다.
※ 4단계
하늘에서 잿빛 구름이 몰려와 무심하게 첫눈이 흩날리며 내리던 어느 늦은 오후, 만석골의 거대한 솟을대문 앞에 낯선 차림새의 여인 하나가 말없이 우뚝 섰다. 조선의 여인들이 입는 옷이 아닌, 청나라식으로 깊게 여민 남색 겹저고리에 발목까지 넉넉하게 덮어 내려오는 통 넓은 바지 차림이었다. 여인의 등에는 범상치 않은 윤기를 뿜어내는 묵직한 옻칠 침통 궤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나이는 어림잡아 서른 안팎으로 보였으나, 굳게 다문 입술과 강물처럼 깊고 서늘한 눈매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구도자의 것처럼 형형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험상궂은 문지기가 여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막아섰을 때, 여인은 품속에서 낡을 대로 낡아 반으로 조심스레 접힌 종이 어음 한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놀랍게도 정확히 삼십 년 전, 혈기 왕성하던 홍만석이 직접 찍어준 붉은 낙관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압록강 너머 심양에서 온 연란이라 합니다. 이 집의 대객주 어르신께 갚아야 할 지독한 목숨 빚이 하나 있어 그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안채에서 거들먹거리며 걸어 나온 큰아들 판술이, 여인의 행색과 어음을 힐끗 보고는 경멸스러운 코웃음을 쳤다.
"하! 어디서 굴러먹던 청국 계집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아버님은 지금 혼수상태로 숨만 붙어 있어 말도 한마디 못 하시는 산송장이오! 삼십 년 전 어음 따위로 빚을 받으러 왔거든, 염라대왕에게나 가서 저승길 노잣돈으로 받으시오! 당장 쫓아내라!"
건장한 하인들이 위협적으로 다가섰으나, 연란은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도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꼿꼿하게 섰다.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시오. 나는 빚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목숨을 갚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차갑고도 단호한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날카로운 겨울바람을 타고 마당을 가로질러, 깊은 안방의 낡은 창호지를 파르르 건드렸을 때. 시체처럼 누워 천장만 바라보던 노인의 무거운 눈꺼풀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크게 요동치며 흔들렸다.
노인의 굳어버린 머릿속으로 삼십 년 전, 의주 국경 밖의 시리도록 추웠던 겨울 풍경이 생생하게 밀려왔다. 무서운 역병이 돌아 시체가 산처럼 쌓여가던 버려진 마을.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차갑게 굳어버린 어미의 시신을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던, 비쩍 마른 열두 살 청국 아이. 당시 장삿길에 올랐던 홍만석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낯선 아이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짐수레에 싣고 무작정 심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는 이름 모를 노부부에게 아이를 맡기며 막대한 약값과 학채까지 아낌없이 내어주고는, 그 후로 바쁜 장사에 치여 새카맣게 잊고 살았던 까마득한 옛일이었다.
바로 그 짐승 같던 세상에서 자신이 살려냈던 유일한 꼬마 아이가, 삼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 눈 내리는 대문 앞에 기적처럼 서 있다는 것인가. 노인의 굳게 잠겨있던 목구멍 속에서 삼 개월 만에 처음으로 짐승의 끓는 소리 같은 거친 신음이 처절하게 터져 나왔다.
"크으윽... 크어어억...!"
말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참혹한 비명과도 같았지만, 마루 밖에서 약탕기를 닦고 있던 삼월이만은 그 신음에 담긴 주인의 절박한 뜻을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그것은 문밖의 그 여인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장 제 눈앞에 들이라는, 목숨을 건 절규였다.
※ 5단계
마침내 거친 소동 끝에 안방에 들어선 연란은, 침상에 누운 늙은 은인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도 흔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가져온 침통을 여는 대신, 묵묵히 자리에 앉아 사흘 밤낮을 꼬박 지새우며 노인의 굳어버린 맥만 짚고 또 짚었다. 차가운 이마에 귀를 대어 숨소리를 듣고, 뻣뻣해진 손발의 관절을 만지며 몸이 기억하는 생명의 남은 불씨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침묵의 사흘이 지나고 나흘째가 되던 차가운 새벽. 마침내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옻칠된 궤를 딸깍 소리와 함께 열어젖혔다. 낡은 상자 안, 고운 붉은 비단 위에는 일반적인 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굵고 긴, 어른 손가락만 한 금빛 침 아홉 대가 서늘한 빛을 뿜어내며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어르신, 이것은 대륙의 비전인 화침이라 불리는 끔찍한 물건입니다. 이 굵은 금침을 시뻘건 화로 불에 직접 달궈, 뼈와 살을 뚫고 들어가 꺼져버린 생명의 양기를 강제로 끌어올리는 극양의 침술이지요. 제게 이 기술을 전수해주신 스승님께서도 평생을 통틀어 오직 세 사람에게만 이 침을 놓으셨고, 그중 운이 좋은 둘은 불길 속에서 살아남았으나 한 명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침을 맞다 숨이 끊어졌습니다."
노인은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만으로 그녀에게 절박하게 묻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위험한 것을, 그것도 다 죽어가는 나에게 쓰려 하느냐고. 연란은 노인의 눈빛을 읽고는 희미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르신. 제가 사흘을 살펴본바, 어르신의 몸은 병이 들어 썩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독하게 얼어붙은 것에 불과합니다. 예순 해라는 끔찍한 시간 동안 차가운 은자만 셈하고 의심만 하며 사느라, 인간이 가져야 할 속불이 깡그리 꺼져버려 빙혈이 된 것이지요. 이 꺼진 속불을 다시 지피려면 불꽃처럼 뜨거워야 하고, 그 뜨거움은 살아있는 지옥처럼 견디기 어렵습니다. 늙고 쇠약한 어르신의 몸으로는 어쩌면 그 불의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중에 비참하게 숨이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저를 원망하셔도 좋습니다."
방 안에는 숨 막힐 듯 팽팽하고 무거운 침묵이 오래도록 흘렀다. 그 고요함을 찢고 창밖에서는 또다시 낯선 사내들이 창고 열쇠를 본뜨기 위해 쇠를 가는 날카로운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심지어 담장 너머로는 셋째 판돌이 두꺼운 포목 창고 문서를 통째로 훔쳐 들고 기방으로 야반도주하듯 도망치는 발소리마저 뚜렷하게 섞여 있었다.
노인은 천장의 옹이 일곱 개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이대로 어두운 방구석에 시체처럼 누워서, 제가 평생 피와 땀으로 일군 거대한 곳간이 자식놈들과 하인들의 손에 비참하게 뜯겨 나가는 소리나 들으며 굶어 죽을 것인가. 아니면 저 살벌한 금빛 침을 온몸에 박아 넣고 불 속에 들어가 비명을 지르며 타 죽을 것인가.
예순 해 동안 단 한 번도 손해 보는 장사를 한 적 없고, 늘 가장 안전하고 밑지지 않는 쪽만 영악하게 골라왔던 늙은 객주가, 생애 처음으로 제 목숨을 판돈으로 걸고 거대한 도박의 패를 던지기로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노인의 눈빛에 맹렬한 불꽃이 일었다. 그리고 이내 바닥에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던 그의 오른손 검지손가락 하나가 아주 천천히, 뼈가 으스러질 듯한 고통을 동반하면서도, 극도로 분명하게 안으로 구부러지며 수락의 뜻을 전했다.
※ 6단계
노인의 결연한 뜻을 확인한 연란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 비린내 나는 셈의 공간에서는 절대로 어르신의 얼어붙은 몸을 덥힐 수 없습니다. 사방에서 썩어가는 곳간 냄새와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숨소리가 진동하는 곳에서는, 기적의 침술도 독약이 될 뿐입니다. 떠나야 합니다."
연란의 말에 따라 다음 날 이른 아침, 만석골에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졌다. 천하의 대객주 홍만석이 최고급 가마가 아닌, 마른 짚이 깔린 허름한 소달구지에 짐짝처럼 실려 집을 나서는 참이었다. 연란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하녀인 계집종 삼월이 단 한 명만을 대동한 채, 곧바로 도성 밖 험준한 북한산 자락 깊은 곳에 버려진 빈 암자를 향해 소를 몰았다.
놀라운 것은 그 거대한 부를 짊어진 가장이 산으로 쫓겨나듯 떠나는데도, 아들 셋과 행수들 중 그 누구도 눈물 흘리며 말리거나 따라붙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의 얼굴에는 교활한 안도감과 반색이 가득했다.
"아버님께서 이 누추하고 소란스러운 집을 떠나 맑은 산 공기를 쐬시면 병환에 차도가 있으실 겝니다. 소자, 아버님 요양하시는 데 한 치의 방해가 될까 심히 염려되오니 문병조차 오지 않고 이곳에서 집안 단속에만 매진하겠나이다."
판술은 눈물을 쥐어짜 내는 시늉을 하며 불효를 효심으로 포장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곁에 섰던 수석 행수 최두칠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날로 은밀하게 뒷방에 숨어들어 진짜 곳간 장부를 불태우고 가짜 장부를 새로 꾸미기 시작했다. 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돈만 알던 늙은이가 결국 재산 다 뺏기고 자식들에게 고려장 당하듯 산으로 버려졌다'며 혀를 차고 수군댔지만, 그 가파른 산길을 덜컹거리며 올라가는 소달구지 안에서 노인은 예순 해 만에 처음으로 속이 뻥 뚫리는 듯한 기이하고도 홀가분한 해방감을 맛보고 있었다.
반나절을 꼬박 올라 도착한 산중의 암자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금은보화가 가득한 거대한 곳간도, 복잡한 숫자가 적힌 장부도, 권력을 상징하는 쇳덩어리 열쇠도, 아침저녁으로 입에 발린 거짓 인사를 올리는 징그러운 인간 무리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바람을 막아줄 낡은 흙벽과 불을 지필 작은 아궁이 하나, 약초를 끓일 무쇠솥 하나, 그리고 이 차가운 산속에서 기꺼이 자신을 살리려 팔을 걷어붙인 여인의 온기 어린 두 손뿐이었다.
도착한 첫날 밤, 연란은 삼월이와 함께 아궁이에 불을 때고 창포와 독한 생강을 가득 썰어 넣은 뜨거운 물을 끓였다. 그녀는 주저 없이 거동조차 못 하는 노인의 낡은 비단옷을 모두 벗겨내고, 거친 무명수건에 뜨거운 약물을 적셔 시체처럼 창백한 몸 구석구석을 맹렬하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살갗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닦아낸 후, 그녀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노인의 팔다리를 억지로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혈을 누르며 돌처럼 굳은 뼈마디를 무자비하게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살이 찢어지게 아프면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십시오! 체면 따위 차린다고 이 악물고 참으면 뱃속에 기가 막혀 당장 숨이 끊어집니다!"
노인은 지난 육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남 앞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나 나약한 소리를 질러본 적이 없었다. 혹여라도 나약해 보이면 거래에서 값을 깎일까 봐, 세상 사람들에게 얕보여 곳간을 털릴까 봐 뼛속까지 썩어 들어가도 늘 억지로 웃는 척만 해왔던 삶이었다. 하지만 연란의 무자비하고도 정확한 손길이 막혀있던 기혈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 노인의 굳게 닫혀있던 입이 쩍 벌어지며,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억눌려왔던 짐승 같은 처절한 비명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악-!"
한밤중, 깊고 텅 빈 북한산의 골짜기가 늙은 사내의 한 맺힌 울부짖음을 온전히 받아내어 수십 번 되돌려주었다. 그것은 완벽하게 얼어붙었던 심장이 다시 미세하게 박동을 시작하는, 노인의 새로운 인생을 알리는 첫날밤의 숭고한 비명이었다.
※ 7단계
지옥 같은 치료는 동이 트는 새벽과 해가 지는 저녁, 하루 두 번씩 어김없이 치러졌다. 그리고 그 끔찍한 고통 사이로 찾아오는 길고 고요한 낮 시간 동안, 방 안에는 훈훈한 약초 냄새와 함께 두 사람이 나누는 낮은 목소리의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연란은 심양의 노부부 밑에서 자라며 독학으로 조선말을 완벽하게 익혔다고 담담히 고백했다.
"은인이신 어르신의 나라는 조선인데, 훗날 은혜를 갚으러 찾아갔을 때 말이 통하지 않아 제 마음을 전하지 못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열세 살 때부터 밤마다 조선 상인들이 묵는 객주를 몰래 찾아다니며, 어깨너머로 억척스럽게 조선말을 배웠지요."
그녀가 험난한 대륙을 떠돌며 괴팍한 스승 밑에 들어가 모진 고생을 견디며 기적의 화침술을 배운 이유도 오직 하나뿐이었다.
"어르신께서 저를 구해주신 지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분명 제가 찾아갈 즈음엔 몸이 늙고 깊은 병이 드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늙고 병든 몸을 불사조처럼 살려내는 특별한 재주를 배워야만 제 목숨값을 온전히 갚을 수 있겠다 싶었지요."
이야기를 듣던 노인은 너무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굳어있던 입가를 움직여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비록 한쪽 입꼬리만 비뚤게 올라간 흉측한 미소였지만, 그것은 수개월 만에 그가 스스로 지어본 첫 웃음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구나. 너는 삼십 년이라는 그 길고 아까운 청춘을, 오직 나라는 늙은이 하나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그 바보 같은 생각 하나로 버티며 살았단 말이냐."
"버틴 것입니다. 그 험악하고 더러운 대륙의 뒷골목에서, 세상 어딘가에 조건 없이 짐승만도 못한 나를 값없이 도와준 따뜻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는 그 사실 하나가... 제가 독한 세상을 살면서 남을 해치는 나쁜 괴물이 되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준 동아줄이었으니까요."
연란의 담담한 고백이 끝난 순간, 노인의 탁하고 메마른 눈동자에서 억제할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왈칵 흘러내려 거친 뺨을 적셨다. 평생 그는 셈판 위에서 단 일 푼의 손해도 용납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도 대가 없이 무엇을 내어준 적이 없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해 겨울 국경에서 죽어가던 꼬마 아이 하나를 거둔 것만이 그의 치밀했던 인생에서 유일한 예외였고, 그것조차 술김에 벌인 가벼운 변덕이라 치부했었다. 그런데 그 찰나의 작은 변덕 하나가, 삼십 년의 세월을 먹고 자라나 이토록 거대한 구원이 되어 지금 시체처럼 썩어가던 제 목숨을 멱살 쥐듯 끌어올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 산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면, 연란은 화로에 불을 지피고 노인의 굽은 등 뒤에 바짝 누워 제 몸의 따뜻한 체온을 노인의 차가운 등에 빈틈없이 붙여주었다.
"약초를 백 첩 달여 먹는 것보다, 사람과 사람이 맞닿아 나누는 이 온기가 굳은 몸을 녹이는 데는 백배 낫습니다."
어색함에 몸을 굳히던 것도 잠시,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뭉쳐있던 노인의 어깻죽지가 그녀의 부드러운 온기를 따라 마법처럼 조금씩 스르르 풀려갔다. 노인은 수십 년 동안 철저히 잊고 살았던, 낡아 빠진 기억 속의 감각을 천천히 떠올렸다. 아무런 계산이나 의심 없이 누군가와 한 이불을 덮고 편안히 잠에 빠져드는 일. 장부의 숫자로는 결코 셈할 수 없는 사람의 맹목적인 온기. 그것이 자신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수만 냥의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하고 무겁다는 진실을, 사내는 다 늙어버린 일흔셋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슴을 치며 깨닫고 있었다.
※ 8단계
본격적인 화침의 치료가 시작되자, 고요하던 산속 암자는 매일 밤 생사를 넘나드는 처절한 전쟁터로 변모했다.
연란은 활활 타오르는 참숯 불덩이 속에 손가락 굵기의 황금 침 아홉 대를 찔러 넣어, 시뻘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쇠가 녹아내릴 듯한 끔찍한 열기를 머금은 침이 식기 직전, 그녀는 짐승처럼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노인의 얼어붙은 등뼈를 따라 핵심 기혈 아홉 자리에 주저 없이 꽂아 넣었다.
"치이이익-!"
살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노인의 앙상한 살갗에서 하얀 김이 폭포수처럼 피어올랐다. 극양의 화기가 척수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노인은 말 그대로 팔팔 끓는 용광로 불밭에 산 채로 던져진 듯한 극통에 몸부림치며 눈을 뒤집어깠다. 몸이 튀어 오르려 하자 연란은 망설임 없이 노인의 등 위로 올라타, 체중을 실어 그의 어깨를 필사적으로 억눌러 붙들었다.
"달아나지 마십시오! 이 끔찍한 불기운이 어르신의 뼛속 깊은 곳 뼛골까지 완벽하게 파고들어야만 그 지독한 빙혈을 녹일 수 있습니다! 악으로 버티십시오!"
처절한 혈투가 반복되던 이레째 되던 날 아침. 통나무처럼 굳어있던 노인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열나흘째 되던 날에는 굽혀지지 않던 팔꿈치가 삐걱거리며 반으로 굽혀졌고, 스무하루째 되던 달 밝은 밤에는 기적처럼 노인이 벽을 짚고 스스로 반 자쯤 허리를 일으켜 세워 앉는 데 성공했다. 그 믿기 힘든 광경을 부엌 문틈으로 훔쳐보던 계집종 삼월이는 솥뚜껑을 부둥켜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연란은 극한의 치료를 이어가는 중에도 낮이면 험준한 북한산 바위산을 미친 듯이 뒤져 희귀한 양기 약재를 캐어 날랐고, 밤이면 피투성이가 된 노인의 몸에 기름을 발라가며 뼈와 근육을 쉼 없이 주물렀다.
화침의 불기운을 받아 몸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자, 늙은 사내에게는 기이하고도 경이로운 변화들이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육십 년 동안 장부를 적느라 까맣게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 등짐장수 시절의 구성진 노랫가락이 자신도 모르게 툭툭 입에서 흘러나왔고, 이십 년 넘게 진수성찬만 먹어대느라 둔해져 버렸던 혀끝이 쌉싸름한 산나물 한 점의 깊은 단맛을 생생하게 알아챘다. 백내장이 낀 듯 침침했던 눈이 기적처럼 밝아져 달빛에 비친 문창살의 정교한 그림자 수를 정확히 세어냈고, 닫혀있던 귀가 열려 처마 끝에서 맺혀 떨어지는 고드름의 물방울 소리마저 청아한 음악처럼 구분해 냈다. 오감이 완벽하게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마침내 산속 생활 서른아흐레째 되던 시린 새벽. 노인은 지팡이조차 짚지 않고 문을 열어젖히며, 오롯이 제 두 발로 마당의 차가운 눈밭 위에 꼿꼿하게 섰다. 눈 덮인 거대한 산 아래로, 한때 자신이 쥐락펴락했던 한양 도성의 새카만 기와지붕들이 장난감처럼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였다. 그는 가슴을 활짝 펴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뼛속까지 맑고 찬 산공기가 막혀있던 가슴 밑바닥까지 시원하게 뚫고 내려갔다.
그가 부활의 기쁨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을 때, 등 뒤로 조용히 다가온 연란이 등에 담요를 덮어주며 낮게 속삭였다.
"이것으로 육신의 기혈을 뚫는 것은 끝났습니다. 어르신의 몸은 이제 절반을 회복한 겝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나머지 절반의 회복은... 제아무리 뛰어난 화침이라 해도 결코 쇠침으로는 이룰 수 없는 영역입니다."
※ 9단계
연란의 알쏭달쏭한 말에 노인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쇠침으로 뚫지 못한다면, 내 몸의 나머지 절반은 대체 무엇으로 채운단 말이냐."
연란은 대답 대신 보일 듯 말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궁이 앞으로 다가가 굵은 장작을 더 밀어 넣었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이 그녀의 하얗고 맑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날 밤, 눈 덮인 암자의 비좁은 방 안을 비추는 낡은 등불은 새벽이 오도록 오래도록 꺼지지 않고 일렁였다. 연란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침이 화로에서 지핀 끔찍한 불은 육신의 껍데기를 간신히 덥혀 생명줄을 이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가 진정으로 다시 숨 쉬며 살아가려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속불이 타올라야 하며, 그 영혼의 속불은 오직 '사람'이 내어주는 순수한 진심과 온기로만 지필 수 있다고 했다.
암자 문밖으로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며 밤새 소리 없이 무거운 눈이 처마까지 쌓였지만, 작은 방 안에서는 화로의 온기 속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와 서로를 향한 나지막한 말들만이 밤새도록 깊고 다정하게 오갔다.
그것은 예순 해라는 끔찍한 세월 동안, 세상의 모든 것을 대차대조표의 숫자로만 판단하고 셈판 위에서만 존재 가치를 찾던 늙은 사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일 푼의 셈도 이익도 따지지 않고 타인에게 자신의 가장 연약한 밑바닥을 온전히 내어준 밤이었다. 동시에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척박한 땅에서 은혜 하나 갚겠다는 지독한 집념 하나로 자신을 날카롭게 벼려온 젊은 여인이, 마침내 제 목숨의 은인을 살려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깊이 묻어두었던 여인으로서의 애틋한 마음까지 조심스레 노인의 곁에 얹어놓은 밤이기도 했다.
멀리 산자락 아래 마을에서 새벽닭이 첫울음을 길게 울 무렵. 노인은 제 가슴 속에서 쿵, 쿵, 하고 울리는 심장 소리가 마치 피 끓던 스무 살 청년 시절처럼 거세고 뜨겁게 뛰고 있음을 똑똑히 느꼈다. 어둠이 물러가고 창호지가 서늘한 푸른빛으로 밝아올 때, 그는 거추장스러운 이불을 힘차게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오른손과 왼손, 뭉툭한 손가락 열 개가 모두 그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움직였다. 발가락도 신경을 따라 경쾌하게 까딱거렸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그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깊이 감싸 안았다. 깊게 파인 주름진 뺨 아래로, 식어버렸던 핏줄을 타고 활화산처럼 뜨거운 피가 힘차게 솟구쳐 도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감격의 눈물을 닦아내는 노인의 등을 따뜻하게 쓸어내리며 여인이 미소 지었다.
"축하드립니다, 어르신. 이제 어르신은 썩어가는 죽은 송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저 산 아래 한양 사람들과 어르신의 핏줄들은 아직도 어르신이 뼈만 남아 죽어가는 줄 안다는 것이지요."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방문 너머를 응시했다. 그 눈빛은 석 달 전 방구석에 누워 천장 옹이나 세며 죽음을 기다리던 무기력한 늙은이의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이빨을 드러낸 호랑이처럼, 한양 육의전을 공포로 호령하던 전설적인 대객주 만석꾼의 잔혹하고 맹렬한 눈빛으로 완벽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그거 참으로 잘된 일이로구나. 죗값을 치러야 할 산 사람의 세상으로, 죽었다던 귀신이 제 발로 다시 살아서 돌아가야... 과연 그동안 누가 내 진짜 상주 노릇을 하며 내 곳간을 털어먹었는지, 낱낱이 그 추악한 낯짝들을 마주할 수 있지 않겠느냐."
사내의 낮고 서늘한 웃음소리가 이른 아침의 차가운 산바람을 타고 위태롭게 흩어졌다. 그것은 자비 없는 핏빛 복수를 예고하는 첫 번째 신호탄이었다.
※ 10단계
노인이 산속에서 부활의 불씨를 지피며 칼을 갈고 있던 그 무렵, 산 아래 만석골에서는 연일 징그럽고도 화려한 탐욕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석 행수 최두칠은 그동안의 충직한 가면에 완벽히 숨겨두었던 뱀 같은 발톱을 온전히 드러냈다. 그는 오래전 홍만석이 사용하던 인장의 미세한 홈까지 완벽하게 본떠 만든 위조 인장을 사용하여, 노인 명의로 된 가장 노른자위 곡물 창고 아홉 채의 물목을 통째로 경쟁 상대인 송상(송도 상인)에게 막대한 은자를 받고 넘겨버리는 끔찍한 매매 문서를 꾸몄다.
장남 판술은 아비가 죽기도 전에 한양 제일의 문장가를 매수하여 아비의 위대한 일대기를 과장한 화려한 부고장을 미리 수십 장 써두었고, 최고급 삼베로 상복까지 치수별로 넉넉하게 지어 벽장에 쌓아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둘째 판구는 밤마다 인부들을 매수하여 어물 창고의 물건들을 제 처가댁 곳간으로 야금야금 돌려 빼돌렸고, 막내 판돌은 형들에게 질세라 몰래 포목 창고의 비단들을 헐값에 팔아치운 돈으로 기방을 통째로 빌려 기생들을 끼고 사흘 밤낮을 술에 취해 지새웠다.
시집간 딸 아지만이 아비의 병환이 걱정되어 눈물바람으로 사람을 보내고 친정을 찾았으나, 오라비들은 산속 요양에 방해가 된다며 억지 핑계를 대고는 매번 사나운 하인들을 시켜 여동생의 발길을 문전에서 모질게 내쫓았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그들의 더러운 사기극에 치명적인 제동이 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륙의 큰손인 청국 상단과 체결하기로 되어있던 은자 삼만 냥짜리 거대한 인삼 독점 계약이 문제가 된 것이다. 청국 상단 측에서 그 엄청난 계약의 담보로 만석골 창고 전체의 소유권을 요구했고, 계약 성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대객주 홍만석 본인의 자필 수결(서명)이 문서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깐깐한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눈앞의 삼만 냥에 눈이 돈 최두칠은 결국 대역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노인의 굳은 손목을 잡고 억지로 시켰다며 가짜 수결을 그럴싸하게 위조해 낸 것이다. 그러나 상단 측에서 수결의 진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만약 위조 사실이 관아에 들통나게 되면 최두칠은 물론이고 아들 셋까지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해 평생 유배를 가거나 목이 잘릴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 끔찍한 파국을 막을 유일하고도 완벽한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죽어가는 홍만석이 서류가 발각되기 전에 정말로, 그리고 확실하게 숨을 거두어 모든 의심을 무덤까지 안고 가버리는 것.
달빛조차 먹구름에 가려 시커멓던 어느 밤. 험준한 산속 암자에 검은 복면을 한 낯선 사내 넷이 은밀하게 기어올라왔다. 아들들이 보낸 자객들이었다. 그들이 문병을 왔다며 들고 온 봇짐 안에는 아비의 병을 고칠 약봉지가 아니라, 거센 산바람에 불을 지필 부싯돌과 독한 기름통, 그리고 시퍼런 단도들이 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살기를 먼저 알아챈 것은 평생을 대륙의 험지에서 살아남았던 연란이었다. 그녀는 곤히 잠든 노인을 황급히 뒷방 마루 밑 깊숙한 공간에 쑤셔 넣듯 숨기고는, 제 품에 아홉 대의 금침만을 챙긴 채 홀로 마당에 나섰다.
"누구냐! 약에 독이라도 탔느냐!"
그녀의 호통과 동시에 사내들이 단도를 빼 들고 덤벼들었다. 연란은 날렵하게 몸을 피하며 저항했지만, 무장한 장정 넷을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한 사내의 시퍼런 칼날이 그녀의 왼쪽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붉은 피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늙은이는 어디 있느냐! 쳐라! 불을 질러라!"
자객들은 어둠 속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여인을 내버려 두고, 암자 곳곳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렀다. 메마른 짚단과 목재로 된 암자는 순식간에 시뻘건 화염에 휩싸였다. 사내들은 맹렬한 불길이 뒷방까지 완벽하게 집어삼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산 아래로 사라졌다. 활활 타오르는 화염 밖, 하얀 눈밭 위로 여인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핏자국만이 길고 처참하게 이어져 있었다.
※ 11단계
산 전체를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타오르던 암자의 불길은, 하늘이 노인의 편이었는지 새벽녘 무렵 몰아치기 시작한 거센 눈보라 덕분에 간신히 꺼졌다. 날이 밝아오자 뼈대만 남아 시커멓게 타버린 잿더미 위로 차가운 눈이 소복이 내려앉아 기괴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마루 밑 깊은 흙구덩이 속에 숨어 가까스로 화마를 피한 노인이 밖으로 기어 나왔을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옥 그 자체였다. 눈밭 한가운데, 연란이 피투성이가 된 채 엎드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노인은 잿더미 속을 기어가듯 달려가 눈밭에 무릎을 꿇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여인의 왼쪽 어깨뼈 밑까지 자객의 시퍼런 칼이 깊게 파고들어 혈관을 끊어놓았고, 끊임없이 솟구치는 피가 하얀 눈밭을 섬뜩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피 묻은 손으로 제 상처에 직접 침을 놓으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러나 힘이 빠져 덜덜 떨리는 손은 이내 허공을 갈랐고, 쥐고 있던 옻칠 침통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며, 그녀가 목숨처럼 아끼던 금빛 화침 아홉 대가 차가운 흰 눈 위로 덧없이 흩어져 버렸다.
"어… 어르신… 저 눈 위에 떨어진… 침통을… 주우십시오… 저것이… 제가 가진 전부입니다…"
연란은 고통에 일그러진 입술을 달싹이며 힘겹게 속삭였다. 그러나 노인은 바닥에 뒹구는 귀한 금침을 줍는 대신, 피에 젖어 싸늘하게 식어가는 여인의 작은 몸을 자신의 넓은 가슴으로 부서질 듯 더 세게 끌어안았다.
"침 따위가 대수냐! 눈을 떠라! 제발 눈을 감지 말거라!"
겁에 질린 계집종 삼월이가 산 아래 마을로 미친 듯이 달려가 의원을 찾았으나,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마을의 용하다는 의원 셋은 짠 듯이 모두 핑계를 대며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왕진을 거부했다. 만석골의 큰서방님 판술이 자객을 보내기 전, 미리 의원들에게 막대한 돈을 쥐여주며 산에서 부르는 왕진은 무조건 거부하라고 철저히 손을 써둔 까닭이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쉼 없이 피를 흘린 연란의 숨소리가 거미줄처럼 가늘어졌다. 노인은 평생 단 한 번도 하늘이나 신을 믿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빌고 또 빌었다.
"하늘이시여! 제발 이 가엾은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제 곳간 열두 채를 몽땅 태워버려도 좋고, 예순 해 동안 악착같이 벌어들인 재물을 단 한 푼도 남김없이 이 산바닥에 뿌려도 좋으니… 제발 이 사람 하나만 살려주십시오!"
피맺힌 절규 속에서, 노인은 문득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끔찍한 진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전부를 걸어 지키고자 했던, 신에게 거래 조건으로 내건 그 거대한 '곳간'은 이미 제 것이 아니었다. 자식이라는 이름의 짐승들이 갈기갈기 찢어 나눠 가졌고, 충직한 척하던 행수가 서류를 조작해 훔쳐 갔으며, 급기야는 아비의 목숨까지 끊어 놓으려 불을 질러버렸다. 그가 예순 해 평생 피땀을 바쳐 쌓아 올린 철옹성 같던 부와 권력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 모래성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제 일흔셋 노인의 거친 손아귀에 남은 것은, 차가운 눈 위에 쓸쓸히 흩어진 쇠꼬챙이 같은 침 아홉 대와, 제 품 안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싸늘하게 식어가는 가엾은 사람 단 하나뿐이었다.
"크아아아아아!"
노인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상처 입은 늙은 짐승처럼 길고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 피맺힌 울음소리가 잿더미가 된 북한산 골짜기를 세 번이나 쓸쓸하게 돌아 나갔다.
※ 12단계
불타버린 암자를 떠나, 산 아랫마을 구석에 버려진 화전민의 낡은 흙 움막으로 피신한 지 어느덧 이레의 시간이 흘렀다. 움막 안은 뼈를 깎는 듯한 추위와 어둠으로 가득했지만, 노인은 단 한 숨의 잠도 자지 않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연란이 의식을 잃기 전 간신히 가르쳐준 처방대로, 그는 산을 이 잡듯 뒤져 피를 멎게 하는 지혈 초근목피를 캐왔다. 평생 붓과 셈판만 쥐느라 굳은살 하나 없이 매끄러웠던 늙은 객주의 손이, 이제는 투박한 나무 약절구를 쥐고 밤새도록 쿵쿵 소리를 내며 생약을 찧고 또 찧었다. 상처가 곪지 않도록 직접 불을 피워 쑥뜸을 뜨고, 새 살이 돋기를 기원하며 피고름을 제 입으로 빨아내는 짐승 같은 간호가 이어졌다.
움막의 작은 창문 밖으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고 어두운 밤마다, 노인은 묵묵히 제 인생의 첫 장부터 다시 펴놓고 냉정하게 세기 시작했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제 몸집보다 큰 볏짚 봇짐을 지고 칼바람을 맞으며 장삿길에 나섰던 날. 얼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처음으로 은자 한 냥을 손에 쥐고 오열했던 밤. 그리고 첫아들 판술이 태어나 응애거리는 울음소리를 냈던 날….
그러나 참담하게도, 그는 첫아들이 태어나던 그 경사스러운 날에도 아내 곁이 아니라 새 물건이 들어오는 곳간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평생 고생만 시킨 아내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그날 밤조차, 그는 장례 준비는 뒷전으로 미룬 채 개성 상단의 행수들과 피 말리는 이권 흥정에 매달려 있었다.
아들들이 아비의 건강을 걱정하기는커녕, 곳간 열쇠에만 눈독을 들이며 아비의 죽음을 손꼽아 기다리는 괴물로 자라난 것은, 결코 재수가 없거나 하늘이 내린 억울한 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이문을 남기기 위해 처자식마저 셈의 도구로 삼았던 홍만석, 그 자신이 직접 씨를 뿌리고 길러낸 끔찍한 괴물 농사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사람으로서의 정을 가르치는 대신 오직 잔혹한 셈법만을 가르쳤고, 자식들은 배운 대로 아비의 목숨마저 정확한 숫자로 셈하여 내다 버린 것이다.
그 지독하고도 추악한 진실을 인정하고 뼛속 깊이 받아들이는 데, 이 불쌍한 늙은이는 자그마치 일흔세 해라는 긴 시간을 낭비해야만 했다.
치열한 간호의 보람이었을까, 닷새째 되던 깊은 밤. 시체처럼 창백했던 연란의 미간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렸다.
"어르신... 저... 아직... 안 죽었습니다..."
갈라진 목소리가 움막의 적막을 깼다. 노인은 그녀의 차가워진 손을 부서질 듯 꽉 쥐고는 한참 동안이나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안 죽었구나. 살아주어 참으로 고맙다. 내가 예순 해를 짐승처럼 살며 평생 커다란 곳간만을 미련하게 지켰는데... 정작 목숨을 걸고 지켰어야 할 것은 썩어 없어질 곳간이 아니었더구나."
여드레째 되던 아침, 연란이 마침내 스스로 몸을 반쯤 일으켜 삼월이가 끓여온 멀건 미음 반 그릇을 기적처럼 비워냈다. 노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당으로 나가, 밤새 움막 앞을 가로막은 무거운 눈을 싸리비로 쓸기 시작했다. 거칠게 눈을 쳐내며 그는 마음속으로 굳고 서늘한 결심을 다졌다.
'다시 그 더러운 한양 땅으로 내려가리라. 허나, 나를 죽이려 한 짐승 같은 자식들에게 피 묻은 복수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시작했던 이 추악한 장사의 끝을 맺으러... 그 모든 셈을 영원히 끝장내러 갈 것이다. 내 인생의 썩어빠진 마지막 장부를, 이 두 손으로 완벽하게 덮어버릴 것이다.'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 늙은 객주의 등은 바위산처럼 올곧고 단단해져 있었다.
(대기)
※ 13단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정월 초하루 아침. 죽은 자의 혼을 위로한다는 곡소리가 울려 퍼지려던 한양 만석골의 거대한 솟을대문이 굉음과 함께 활짝 열려 젖혀졌다. 문상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마당 한가운데 드넓게 쳐둔 하얀 차일 아래로, 석 달 전 피를 토하며 산속에서 타 죽었다고 확신했던 노인이 오롯이 제 두 발로 땅을 딛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죽었다던 귀신의 몰골이 아니었다. 구부정했던 등은 장군처럼 꼿꼿하게 펴져 있었고, 창백했던 뺨에는 붉은 핏기가 생생하게 돌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경악하게 한 것은 노인의 곁에 선 인물들이었다. 왼쪽 어깨에 두꺼운 무명 붕대를 칭칭 감은 청국 여인 연란이 한 손에는 묵직한 옻칠 침통을 들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노인의 곁을 호위하듯 서 있었고, 그 뒤로는 계집종 삼월이가 당당한 표정으로 따르고 있었다.
마당에 모여 거짓 눈물을 찍어내던 수백 명의 상인들과 하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 아... 아버님...?"
장차 상단의 주인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화려한 상복을 차려입고 거들먹거리던 장남 판술의 입에서 넋 나간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의 손에 쥐여져 있던 곡비(대신 울어주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동전 꾸러미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둘째 판구와 막내 판돌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고, 완벽한 범죄를 저질렀다 자부하던 수석 행수 최두칠은 사시나무 떨듯 무릎이 꺾여 주저앉고 말았다.
노인은 경악하는 짐승 무리에게 단 한 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는 뚜벅뚜벅 안채로 걸어 들어가, 예순 해 동안 한양 상권을 호령하며 앉았던 묵직한 호랑이 가죽 방석 위에 다시금 군림하듯 앉았다. 그러고는 얼빠진 행수들을 향해 벼락같은 호통을 쳤다.
"무엇들 하느냐! 당장 내 곳간 열두 채의 진짜 장부와 가짜 장부, 그리고 최근 석 달 치 매매 문서를 모조리 내 앞에 대령하지 않고!"
그 호통 한 번에 상단은 엎어진 벌집처럼 발칵 뒤집혔다. 행수들이 기어 다니며 장부들을 산더미처럼 대령했다. 노인은 떨리는 최두칠이 내민 서류들을 넘기기 시작했다. 위조된 가짜 인장의 미세한 인주 번짐, 교묘하게 먹물을 덧칠해 고쳐 쓴 곡물의 숫자, 송상에게 헐값에 넘어간 창고의 은자 흐름, 심지어 처가댁으로 빼돌린 명태 삼백 동의 장부 누락까지. 평생을 장부 속 숫자와 거짓말을 일삼는 산 사람의 뱃속만 들여다보고 살아온 이 늙은 여우에게 그 얄팍한 조작들을 찾아내는 것은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는 장난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노인은 격노하여 호통을 치지도, 최두칠의 멱살을 잡아 관아에 사기죄로 고발하지도 않았다. 삼만 냥이 걸린 청국 상단과의 목숨을 건 계약도 파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날 밤부터 가장 은밀하고도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으로 판을 뒤집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거액의 돈을 풀어 가장 믿을 수 있는 옛 상단 동지들을 섭외했다. 의주로 향하는 가장 안전한 루트를 통해 자신이 남몰래 빼돌려둔 진짜 물목과 알토란 같은 핵심 재화들을 두 달 치 짐으로 꾸려 먼저 실어 보냈다. 또한, 심양의 옛 거래처 거물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찰 다섯 통을 써서 파발을 띄웠다. 그것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장사가 아니라, 조선의 최고급 인삼과 질 좋은 한지를 청국의 비단과 약재로 교환하는 거대한 직거래 루트, 그 새로운 길 위에 세울 완전히 새로운 상단의 초석을 다지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밤마다 안방에는 등불이 켜졌고, 노인과 연란이 마주 앉아 새로운 장부를 작성했다. 노인이 숫자를 읊으면 연란이 정갈한 글씨로 기입했다. 최두칠과 판술이 낌새를 채고 사람을 풀어 추적하려 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노인이 자랑하던 가장 큰 창고 열두 채의 진짜 알짜배기 물목은 밤사이 한 줌의 먼지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른 은신처로 빼돌려진 뒤였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음을 확인한 날 밤, 노인은 차가워진 찻잔을 들고 육십 년 만에 가장 후련하고도 깊은 웃음을 소리 내어 터뜨렸다.
※ 14단계
정월 대보름, 한양 하늘에 둥근 달이 떠오르기도 전인 이른 아침. 만석골 마당에는 도성의 내로라하는 상인과 객주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홍만석 대객주가 오늘 이 자리에서 상단의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지명하고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중대 발표를 예고했기 때문이었다.
찬 바람이 부는 마당 한가운데, 아들 셋과 최두칠이 비단옷을 쫙 빼입고 긴장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 등 뒤로는 거대한 솟을대문과 함께 위풍당당하게 늘어선 만석골의 수많은 창고들이 위압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와 네 사람 앞에 섰다. 노인의 손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화려한 나무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노인이 상자를 열자, 기대했던 번쩍이는 황금 열쇠 꾸러미 대신 붉은 녹이 잔뜩 슨 낡고 흉측한 쇳덩어리 열쇠 네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열쇠를 하나씩 꺼내어 던지듯 그들에게 내어주었다.
"장자 판술에게는 서강 나루에 있는 첫 번째 곡물 창고를 물려준다. 차자 판구에게는 마포 어귀의 어물 창고를, 막내 판돌에게는 배오개 시장의 포목 창고를 주겠다. 그리고 내 곁에서 스물다섯 해를 고생한 최두칠에게는... 남대문 밖 가장 큰 소금 창고를 내어주마."
처음 이름이 불렸을 때 환하게 밝아졌던 아들들의 얼굴은, 낡은 열쇠의 촉감을 느끼고 노인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시체처럼 차갑게 굳어버렸다.
"명심해라. 너희에게 내어준 그 창고 네 채는, 모두 스무 해 전 강물이 범람하여 바닥부터 물이 새기 시작해 버려둔 썩어빠진 폐창고들이다. 안을 열어보아도 쥐똥과 썩은 짚단 말고는 단 한 푼의 가치 있는 물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판술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피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쳤다.
"이게 무슨 노망나신 소리입니까! 저희를 능멸하시는 겝니다! 나머지 멀쩡한 스물세 채의 창고는 어찌하시고! 그 안에 가득 찬 은자와 물목들은 다 어디로 빼돌리셨단 말입니까!"
노인은 서늘한 눈빛으로 판술을 쏘아보며 벼락처럼 대꾸했다.
"나머지 스물세 채의 창고는 어제 부로 육의전 상인들에게 정당한 값을 받고 모두 되팔아버렸다! 은자 따위는 이 집에 십 원 한 장 남아있지 않다. 너희 짐승 같은 놈들이 내가 죽기만을 기다리며 석 달 밤낮으로 가짜 열쇠를 복사해대며 탐욕스럽게 세어본 그 은자와 장부들은, 내가 산속 암자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그날 밤 이미 한양 땅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마당에 모인 상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아들들과 최두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넋을 잃었다. 노인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그들을 깔아보며 차갑게 선고를 내렸다.
"내가 평생을 바쳐 너희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것은, 비에 젖으면 썩어버릴 창고가 아니라 그 텅 빈 창고를 황금으로 채우는 '장사하는 법'이었다. 헌데 너희는 사람의 마음은 셈하지 않고, 오직 남의 것을 훔치고 뺏는 창고 껍데기만 배웠더구나. 아비를 죽여서라도 창고를 갖고 싶다 하니, 옛다, 그 창고만은 오롯이 가져라.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빈 것으로 말이다."
노인은 품에서 최두칠이 조작했던 가짜 인삼 계약서와 명태 장부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곁에 놓인 화로 불 속에 그것들을 미련 없이 던져 넣었다. 종이가 시뻘겋게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며 노인이 말했다.
"너희의 죄상을 관아에 넘겨 삼족을 멸하지 않고 스스로 굶어 죽을 기회를 주는 것. 이것이 아비로서, 상전으로서 베푸는 내 생애 마지막 셈이자 자비다."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홱 몸을 돌려 만석골의 대문을 묵묵히 걸어 나갔다. 넋을 잃은 자식들의 오열이 마당을 메웠지만, 그의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문밖에는 노인이 챙긴 진짜 재화와 금괴를 가득 실은 튼튼한 짐수레 열두 대가 출발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고, 그 수레의 맨 앞 선두 말의 고삐를 쥔 연란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15단계
잔인했던 겨울이 물러가고, 대지에 푸른 생명이 움트는 이월. 아득히 먼 북녘 의주 국경에 가장 먼저 따뜻한 봄물이 들기 시작했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압록강 여울의 얼음이 녹아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그곳. 조선과 청국을 잇는 장대한 강물을 건너기 위해 줄지어 선 짐수레 열두 대의 거대한 행렬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 장엄한 행렬의 맨 앞, 가장 크고 튼튼한 백마의 등 위에는 위풍당당한 자태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불과 넉 달 전, 한양의 비좁은 방구석에 산송장처럼 누워 천장 서까래의 옹이나 세며 죽음을 기다리던 그 나약한 노인이었다.
지금 그는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에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굽이치는 압록강 너머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대륙의 벌판을 맹렬한 기세로 응시하고 있었다. 한때 굽어있던 등은 태산처럼 꼿꼿했고, 거친 고삐를 말아 쥔 두꺼운 손아귀에는 젊은 무사 못지않은 강인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말을 나란히 하고 노인의 곁에 바짝 다가선 연란이, 따뜻한 봄바람을 타고 품에서 꺼낸 새로운 상단의 깃발을 힘차게 펄럭이며 펼쳐 보였다. 눈이 시리도록 강렬한 붉은 바탕에, 기개 넘치는 필체로 선명하게 수놓아진 두 글자.
'화란(火蘭).'
생명의 불꽃을 상징하는 불 화(火) 자와, 그 불을 지펴 노인을 살려낸 여인의 이름에서 딴 난초 란(蘭) 자. 죽음의 문턱에서 피어난 기적 같은 불침과, 모든 것을 걸고 그 불을 놓아준 사람의 진심을 하나로 합쳐 만든 새로운 상단의 이름이었다.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에 노인이 호탕하게 웃자, 연란이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타박하듯 말했다.
"어르신, 아무리 몸이 좋아지셨다 한들 방심하시면 아니 됩니다. 심양 땅에 무사히 닿으시면 최소 사흘은 여각에 꼼짝 않고 누워 푹 쉬셔야 합니다. 아직 어르신의 뼛속에 남은 냉기를 빼기 위해 화침을 맞으셔야 할 자리가 두 군데나 더 남아있으니까요."
노인은 기가 찬다는 듯 껄껄거리며 대꾸했다.
"이보게, 화란 객주. 그 잔소리는 목적지에 닿거든 사흘 뒤에 다시 하거라. 험난한 압록강을 건너보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늙은이를 환자 취급하며 눕혀버릴 셈이냐!"
두 사람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강물 위로 시원하게 흩어졌다. 아득히 멀어지는 조선 땅, 그 너머의 한양 만석골에서는 쥐똥만 굴러다니는 낡은 폐창고 네 채를 두고 형제들끼리 피 터지게 멱살을 잡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추악한 짐승들의 비명 소리가 아직도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긋지긋하고 비참한 소리는 이 넓고 거친 압록강을 결코 건너오지 못했다.
말을 모는 노인은 문득, 예순 해 평생 처음으로 머릿속에서 '셈'을 하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짐을 풀어 벌어들일 은자의 양도, 내일 다른 상단과의 거래에서 남겨먹을 이문도 전혀 헤아리지 않았다. 장부의 팍팍한 숫자 대신 그의 오감을 채우는 것은 오직 어깨를 데워주는 따스한 봄볕이었고, 곁에서 나란히 말을 모는 든든한 사람의 체온이었으며, 그들이 함께 개척하며 나아가야 할 새롭고 찬란한 길이 무한히 남아있다는 가슴 벅찬 사실뿐이었다.
"가자! 저 너머로!"
노인이 힘차게 말배를 걷어찼다. '이랴!' 하는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금괴와 진귀한 물목을 가득 실은 열두 대의 짐수레바퀴가 일제히 우렁찬 소리를 내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상단이 대륙을 향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일흔셋 늙은 사내의 인생에 찾아온 이 눈부신 봄은, 그가 예순 해 동안 살아온 척박했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이르고, 가장 따뜻하며, 가장 눈부신 진짜 봄이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함께하신 조선의 통쾌한 인생역전극, 황혼의 대객주와 청국 침술녀의 이야기 어떠셨나요? 썩어가는 곳간에 갇혀 탐욕에 짓밟혔던 노인이 목숨을 건 화침과 곁에 남은 단 한 사람의 온기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여러분께도 뜨거운 위로와 카타르시스를 전해드렸기를 바랍니다. 텅 빈 창고를 물려준 핏빛 복수, 정말 속 시원하지 않으셨나요?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잊지 마시고요! 저는 다음 이 시간에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오늘 밤도 따뜻하고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