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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세 번 떨어지고 낙향하니 『삽교만록』

양반야담 2026. 8. 26. 07:14

과거 세 번 떨어지고 낙향하니 『삽교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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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십 년. 그 모진 세월 동안 과거에 세 번이나 낙방하고 거지꼴이 되어 야반도주하듯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염치없이 문 앞만 서성이는 내게, 십 년 전 그 모습 그대로 그녀가 문을 열고 나타났습니다. 원망 대신 따뜻한 품을 내어준 여인, 그리고 그녀가 10년간 묵묵히 준비해 온 놀라운 반전. 실패한 선비와 그를 품은 여인의 기적 같은 순애보가 지금 시작됩니다.

※ 1: 거지꼴로 고향에 돌아온 밤, 처절한 회한과 서성임.

살을 에는 듯한 섣달그믐의 삭풍이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를 기괴한 비명처럼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달빛조차 두꺼운 먹구름에 가려 스러진 칠흑 같은 밤, 굽이치는 험준한 고갯길을 힘겹게 넘어오는 하나의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짚신은 언제 다 닳아 없어졌는지 알 길이 없고, 얼어붙은 땅바닥을 딛는 맨발에는 붉은 피딱지가 흉측하게 엉겨 붙어 있었습니다. 한때는 눈부시게 희고 고왔을 선비의 도포 자락은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누더기가 되어,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 때마다 사내의 앙상한 뼈대를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헝클어진 상투 위로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가 그의 처참한 몰골을 더욱 스산하고 가련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사내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밭은기침을 억지로 삼키며, 언덕 아래로 희미하게 점멸하는 작은 초가집의 불빛을 향해 텅 빈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십 년이었습니다. 청운의 푸른 뜻을 가슴에 품고 이 고개를 넘어가며,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하는 날 내 손으로 직접 정인의 고운 손에 비단 가락지를 쥐여주겠노라 호언장담했던 세월이 무려 십 년이었습니다.

'어찌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무슨 낯짝으로 그 맑고 고운 애의 얼굴을 본단 말인가….'

사내의 푹 꺼진 두 눈동자에 고인 뜨거운 회한의 눈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한양에서의 십 년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첫 번째 과거 시험에서는 젊은 날의 오만함과 호기로움으로 낙방을 그저 한바탕 웃어넘겼습니다. 삼 년 뒤 치러진 두 번째 과거에서는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답안지를 수십 번 고쳐 썼으나, 돌아온 것은 방가방이라는 쓰디쓴 실패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사 년의 기나긴 세월을 빛 한 줌 들지 않는 고시원의 쥐구멍 같은 방에서 썩어가며 준비한 세 번째 과거. 그 세 번째 낙방을 확인하던 날, 사내는 종로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미친 사람처럼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학문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입신양명이란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양반이라는 알량한 허울 하나를 부여잡고 십 년의 찬란한 청춘을 갉아먹은 자신의 꼴이 너무도 우스웠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날 때 가지고 갔던 가산은 탕진한 지 오래였고, 장터에 나가 남의 연애편지나 대서해주며 글을 팔아 연명하던 비참한 삶마저 지독한 흉년과 돌림병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결국 그는 사흘을 내리 굶은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한양을 떠나, 남의 집 문전에서 밥동냥을 해가며 짐승처럼 남쪽으로,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익숙한 사립문 앞에 다다른 사내는 차마 문고리를 잡지 못한 채 얼어붙은 사람처럼 우뚝 서 있었습니다. 매서운 바람결에 희미하게 다듬이질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밤낮으로 삯바느질을 하고 손발이 부르트도록 길쌈을 하여 자신의 한양 길을 뒷바라지해 주던, 가엾고 어여쁜 그녀였습니다. 내가 떠난 뒤, 이 모진 세상에서 그 여린 몸으로 어찌 살아남았을까. 혹여나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 이미 다른 사내의 품으로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 차라리 그래 주었다면 이 징그러운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사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미련하리만치 우직하게, 이 허름한 사립문 안에서 돌아오지 않는 못난 정인을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돌아가자. 내가 무슨 염치로 저 문을 연단 말인가. 짐승만도 못한 이 몰골로 그 애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수는 없다. 차라리 뒷산의 이름 모를 깊은 골짜기에서 언 송장으로 발견되는 것이 그 애를 위한 나의 마지막 도리일 것이다.'

사내는 피가 흐르는 터진 입술을 꽉 깨물며 억지로 몸을 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굳어버린 발걸음을 떼어놓는 순간, 지난 몇 달간 누적된 극심한 허기와 피로가 둑이 터지듯 한꺼번에 몰려들며 눈앞이 아득해졌습니다. 다리의 힘이 맥없이 풀리며 사내는 마른 짚단이 쌓인 차가운 담벼락 아래로 무너지듯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서히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사내는 십 년 전 바로 이 사립문 앞에서 자신에게 붉은 비단 주머니를 쥐여주며 환하게 웃던 그녀의 어여쁜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서방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시더라도 부디 옥체만은 보존하여 돌아오시어요. 저는 천년만년이고 이 자리에서 서방님을 기다릴 것입니다."

귓가에 다정하게 맴도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도 생생하여 사내는 저승사자가 부르는 헛것을 듣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낡은 사립문에서 '삐그덕' 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사내는 흠칫 놀라 숨을 죽인 채, 담벼락의 짙은 그림자 속으로 몸을 한껏 웅크렸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문이 열리고, 작은 호롱불을 든 누군가의 실루엣이 조심스럽게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불빛 너머로 보이는 너무도 익숙한 치마자락. 얼어붙었던 사내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흉곽을 찢고 나올 듯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 2: 십 년 만의 재회, 묻어둔 눈물과 따뜻한 밥 한 그릇.

호롱불을 든 여인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바람에 호롱불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습니다. 밤을 새워 물레를 돌려 실을 잣다가, 문밖에서 무언가 무거운 것이 둔탁하게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나와본 참이었습니다. 굶주린 들짐승이라도 산에서 내려온 것인가 싶어 사방을 조심스레 살피던 여인의 시선이, 담벼락 아래 웅크린 시커먼 형체에 머물렀습니다. 순간적인 두려움에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을 치려던 여인은, 달빛이 잠시 먹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찰나 그 형체의 곁에 떨어진 낡고 해진 봇짐을 보았습니다. 봇짐의 끊어진 끈에는 십 년 전, 자신이 밤을 지새우며 한 땀 한 땀 정성껏 수놓아 주었던 빛바랜 붉은 비단 주머니가 위태롭게 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손에서 '툭' 하고 호롱불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불은 짚단에 부딪혀 이내 허무하게 꺼져버렸지만, 여인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짐승처럼 웅크린 그 형체를 향해 홀린 듯 비틀거리며 다가갔습니다. 사시나무 떨리듯 진동하는 두 손이 사내의 헝클어지고 악취 나는 머리칼을 지나, 얼음장처럼 차갑고 앙상하게 뼈만 남은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습니다.

"서방님…."

오랜 세월의 그리움이 응어리져 갈라진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흘러나왔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꿈결을 헤매는 듯한 몽환적이고도 애달픈 음성이었습니다. 사내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때 묻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가렸습니다.

"오지 마시오! 제발 가까이 오지 마시오! 나는… 나는 그대가 알던 그 번듯한 사내가 아니오. 그저 길을 잃고 떠도는 거지 발싸개 같은 놈이니, 제발 나를 동정하지 말고 내버려 두고 안으로 들어가시오!"

사내는 다친 짐승의 짐승의 울음 섞인 소리로 절규하듯 소리쳤지만, 목소리는 이미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치욕스러움과 참담함에 당장이라도 땅을 파고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차가운 흙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내의 더럽고 거친 두 손을 억센 힘으로 끌어당겨 자신의 따뜻한 품에 꽉 끌어안았습니다. 사내의 상처투성이 손등 위로 여인의 눈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습니다.

"서방님입니다. 제 지아비인 서방님이 맞습니다. 십 년을 하루같이 그리워하며 문지방이 닳도록 기다렸는데, 어찌 제가 제 서방님의 온기를 모를 수 있겠습니까. 살아오셨군요. 이 모진 세상에서… 기어이 살아 돌아오셨군요."

여인의 처절한 오열에 사내는 결국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내려놓고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십 년간 가슴속에 꾹꾹 눌러 참았던, 양반의 체통이라는 무거운 족쇄 때문에 소리 내어 울지 못했던 서러움과 회한이 활화산처럼 한꺼번에 터져 나왔습니다. 사내는 여인의 좁고 여린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통곡했습니다. 여인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사내의 굽은 등을 한참 동안 토닥일 뿐이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밖에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던 여인은 얼어붙은 사내를 조심스레 부축하여 집 안으로 이끌었습니다. 방 안은 바깥의 혹독한 냉기가 무색할 만큼 따뜻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왜 이런 끔찍한 몰골로 돌아왔는지, 그토록 원하던 과거는 어찌 되었는지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치맛자락을 여미고 부뚜막으로 달려가 펄펄 끓는 물을 데워 큰 대야에 담아왔습니다. 여인은 거친 무명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셔 사내의 얼굴에 묻은 묵은 진흙과 얼룩을 정성껏 닦아내기 시작했습니다. 피딱지가 앉아 흉측하게 변해버린 사내의 발을 따뜻한 물에 담그고, 자신의 고운 손으로 짓무른 상처를 어루만지며 구석구석 씻겨주었습니다. 그 다정한 손길에 사내는 두 눈을 감은 채 그저 조용히 흐느낄 뿐이었습니다.

이윽고 여인이 정갈하고 소박한 소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눈부신 흰쌀밥 고봉과, 시래기를 듬뿍 넣고 푹 끓여낸 구수한 된장국이었습니다. 십 년 만에 맡아보는 고향의 냄새, 뼈저리게 그리웠던 집의 냄새였습니다.

"드셔요. 아무 생각도 마시고, 우선 이 따뜻한 국물로 얼어붙은 속부터 달래시어요."

사내는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한 숟갈, 두 숟갈 뜨거운 국물을 목구멍으로 넘길 때마다 얼어붙었던 오장육부가 눈 녹듯 녹아내리며,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단전에서부터 차올랐습니다. 체면도 잊은 채 허겁지겁 밥을 밀어 넣는 사내의 처절한 모습을 보며, 여인은 방 한구석에 다소곳이 앉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부인. 내가 십 년 동안 그토록 호언장담했거늘, 결국 당신에게 가져온 것은 이 썩어 문드러진 몸뚱어리와 지독한 가난뿐이오. 내 차마 살아서 당신을 볼 면목이 없었는데, 내 죄가 너무도 크오…."

그릇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은 후, 숟가락을 내려놓은 사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조 섞인 목소리로 토해내듯 말했습니다. 여인은 조용히 다가와 사내의 거칠고 투박해진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따뜻하게 감싸 쥐었습니다.

"과거에 낙방한 것이 무슨 대수란 말입니까. 글공부란 본디 세상을 이롭게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지, 벼슬아치가 되어 부귀영화를 탐하기 위함이 아니지 않습니까. 서방님께서 이렇게 제 곁으로 무사히, 숨을 쉬며 살아 돌아와 주신 것, 그것만으로도 저는 천하를 다 얻은 것보다 백배 천배 기쁩니다. 지난 십 년의 고단함과 서러움은 오늘 밤 이 따뜻한 구들장에 모두 내려놓으시지요. 내일은… 내일의 새로운 태양이 찬란하게 뜰 것입니다."

그녀의 다정하고 단단한 목소리는 사내의 뼛속 깊이 박힌 패배감과 열등감을 봄눈 녹듯 씻어내리고 있었습니다. 사내는 그제야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밀려오는 깊고 아늑한 안도감 속에서,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두 다리를 쭉 뻗고 평온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 3: 아침 햇살과 함께 마주한 진실, 십 년을 품어온 여인의 대상방(大商房) 계획.

따스한 아침 햇살이 창호지를 부드럽게 뚫고 들어와 사내의 눈가를 간지럽혔습니다. 천천히 눈을 뜬 사내는 잠시 자신이 지난밤 밖에서 얼어 죽어 저승에 온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착각했습니다. 지난밤의 눈물겨운 재회와 따뜻한 밥상이 모두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친 몸을 포근하게 덮고 있는 최고급 비단 이불의 부드러운 촉감과, 방 안 가득 깊게 배어 있는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묵향이 이곳이 분명한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이 귀한 비단 이불이라니….'

사내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습니다. 어젯밤에는 피로와 눈물에 시야가 가려 미처 보지 못했던 놀라운 풍경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허름하고 낡은 초가집인 줄만 알았던 방안은 윤기가 흐르는 최고급 오동나무장과 화려한 나전칠기로 기품 있게 꾸며져 있었고, 벽에는 값어치를 가늠할 수 없는 명필의 서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선 사내는 더욱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만 숨을 들이켜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고향을 떠날 때만 해도 손바닥만 한 마당에 잡초만 무성하던,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던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집이 아니었습니다. 마당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게 넓게 확장된 대지 위에는 크고 작은 으리으리한 기와집과 거대한 창고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수십 명의 건장한 일꾼이 바쁘게 물건을 나르며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한쪽 창고에서는 눈이 부실 정도로 고운 최고급 명주와 당초문 비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다른 쪽 창고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듯한 질 좋은 쌀과 곡식들이 쉴 새 없이 가마니째 우마차에 실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촌부의 살림집이 아니라, 조선의 물화를 쥐락펴락하는 거대한 상단(商團)의 본거지와 다름없는 엄청난 규모의 장소였습니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마루에 서 있는 사내를 향해, 윤기가 흐르는 고급 비단 치마를 단정히 차려입고 머리에 영롱한 옥비녀를 꽂은 여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습니다. 어젯밤 낡은 무명 치마를 입고 눈물짓던 가련한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수백 명의 사람을 거느린 상단의 기품과 위엄이 철철 넘치는 완벽한 안주인의 자태였습니다.

"밤새 푹 주무셨습니까, 서방님."

여인은 얼어붙은 사내의 손을 부드럽게 이끌어 햇살이 가장 잘 드는 마루 중앙에 앉히고는, 향이 깊은 최고급 작설차를 옥으로 만든 잔에 직접 따라 올렸습니다. 사내는 찻잔을 받아 들면서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커다란 두 눈을 끔벅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부인… 대체 이것이 다 무엇이란 말이오? 십 년 전 내가 한양으로 떠날 때 우리는 쌀 한 줌 구하기 어려워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며 연명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 거대한 상방과 눈을 의심케 하는 재물들은 다 누구의 것이란 말이오?"

여인은 차분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사내의 혼란스러운 눈을 다정하고 깊은 눈빛으로 응시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서방님의 것입니다. 아니, 우리 부부가 떨어져 지낸 세월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흘린 피땀과 눈물이 빚어낸 찬란한 결실이지요."

사내의 두 눈이 화들짝 커졌습니다. 여인은 지난 십 년간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서방님께서 큰 뜻을 품고 한양으로 떠나신 후, 저는 빈방에 홀로 앉아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조선 팔도의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두 모이는 그 험난한 한양 땅에서, 든든한 가문의 뒷배나 재물도 없이 오직 글재주 하나만으로 과거에 급제하기란 필시 하늘의 별 따기일 터. 설령 서방님께서 피를 토하는 노력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한들, 찢어지게 가난한 선비가 쥐꼬리만 한 녹봉만으로 어찌 그 암투가 난무하는 관직 생활을 버티겠습니까. 자칫하면 탐관오리들의 달콤한 꾐에 넘어가 청렴한 선비의 지조를 잃게 되거나,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될 것이 자명했습니다."

여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을 단단하고 굳건한 심지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서방님께서 훗날 벼슬을 얻어 당당히 돌아오시든, 혹은 세상의 벽에 부딪혀 상처 입고 낙향하여 돌아오시든, 절대 흔들리지 않을 든든한 반석을 제가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낮에는 남의 밭에서 흙투성이가 되어 일하고 밤에는 피가 나도록 삯바느질을 하여 푼돈을 모았습니다. 그 돈으로 소금을 떼어다 내륙 깊은 곳에 팔아 이문을 남겼고, 그 이윤으로 다시 질 좋은 목화를 사들여 밤낮없이 베를 짰습니다. 저울눈을 속이려는 교활한 거간꾼들과 칼을 들고 위협하는 무자비한 왈패들 앞에서도 저는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제 등 뒤에는 한양에서 뼈를 깎는 고통으로 글을 읽고 계실 서방님이 항상 저를 지켜보고 계셨으니까요."

사내는 망연자실하여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한양에서 알량한 양반의 체면을 차리느라 술잔을 기울이며 현실을 도피하고 있을 때, 자신의 작고 여린 아내는 진흙탕을 뒹굴고 피눈물을 흘리며 현실과 치열하게 싸워 이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것입니다.

"무려 십 년이 걸렸습니다. 이제 우리 상단은 이 지역 일대의 모든 물화와 상권을 쥐락펴락하는 조선에서 손꼽히는 큰 상방이 되었습니다. 서방님, 이제 그 무겁고 고통스러운 붓을 내려놓으시지요. 천하를 다스리는 깊은 이치는 낡은 사서삼경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쌀 한 톨, 비단 한 자가 어떻게 가난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천하의 막힌 혈을 흐르게 하는지, 이제 저와 함께 이 살아 숨 쉬는 실물의 세상에서 서방님의 진짜 학문을 널리 펼쳐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여인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사내에게 정중하고 깊숙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지어미가 남편에게 올리는 평범한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거친 세상을 맨몸으로 개척한 위대한 거상이, 자신이 평생을 바쳐 사랑하고 가장 존경하는 사내에게 바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청혼이자 새로운 출발의 선언이었습니다. 멍하니 여인을 올려다보던 사내의 두 눈에서, 과거에 대한 모든 미련과 헛된 욕망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맑고 뜨거운 눈물이 다시 한번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 4: 붓을 꺾고 주판을 쥐다, 사대부의 알량한 자존심을 버린 사내.

며칠 뒤,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기와집 안채에는 숨 막힐 듯 무거운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사내는 자신의 앞에 놓인,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게 매끄러운 윤이 나는 나무 주판과, 지난 십 년간 자신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낡고 해진 논어 책을 번갈아 바라보며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상념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옛 성현들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사농공상이라 하였습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으뜸은 붓을 쥔 선비요, 흙을 일구는 농부와 물건을 짓는 장인이 그 뒤를 이으며, 이문을 좇아 물화를 사고파는 장사치는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속물적인 부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운 그였습니다. 십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뼈를 깎는 고통과 외로움을 견디며 오직 붓 하나만을 쥐었던 두 손입니다. 비록 세 번의 과거 낙방이라는 뼈아픈 실패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 거지꼴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평생을 사대부의 알량한 자존심과 고결한 선비 정신 하나로 버텨온 그가, 하루아침에 얄팍한 이문을 따지고 푼돈을 헤아리는 장사치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뼛골을 날카로운 칼로 깎아내는 것만큼이나 견디기 고통스러운 치욕이었습니다.

'내 어찌 저울눈을 속이고 남의 주머니를 털어 푼돈을 헤아리는 시정잡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굶어 죽을지언정, 맑은 물을 마시며 선비의 고고한 지조를 지켜야 하는 것이 사대부의 당연한 도리가 아니란 말인가.'

사내의 넓은 미간에 깊고 짙은 주름이 패었습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주판을 옆으로 밀어내고, 다시 익숙한 묵향이 배어 있는 논어 책을 집어 드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굳게 닫힌 문밖에서 수십 명의 발걸음이 어지럽게 오가는 부산스러운 소리와 함께, 안주인인 아내의 단호하고 서슬 퍼런 목소리가 벼락처럼 들려왔습니다.

"이번 달 평양으로 올라갈 명주와 비단의 수량이 어찌 이리 턱없이 부족하단 말인가! 곧 장마가 들이닥칠 터인데, 비가 오기 전에 물화를 제때 넘기지 못하면 우리 상단뿐만 아니라 평양의 객주들까지 연쇄적으로 낭패를 볼 터! 산길의 길목을 막고 행패를 부리는 산적과 왈패 무리가 있다면, 차라리 우리가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들에게 두둑하게 웃돈을 얹어주어 당장 길을 트도록 하라! 만약 너희들의 늑장으로 수일 내로 상단이 출발하지 못하여 신용을 잃게 된다면, 그 막대한 손해와 책임은 여기 있는 대행수들이 다 떠안아야 할 것이야! 상단의 생명은 첫째도 신용이요, 둘째도 신용임을 어찌 잊었단 말이냐!"

카랑카랑하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아내의 호령에, 수십 명의 덩치 큰 일꾼들과 닳고 닳은 거간꾼들이 "예, 마님!" 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땅을 울렸습니다. 사내는 들고 있던 책을 든 채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틈 사이로 넓은 마당을 내다보았습니다. 거친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거간꾼들과 땀 냄새가 진동하는 짐꾼들 사이 한가운데서, 아내는 머리에 꽂은 옥비녀가 흔들릴 정도로 단호한 태도와 매서운 눈빛으로 거대한 상단의 움직임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칼을 차고 다니는 왈패들의 무자비한 위협이나 교활한 상인들의 농간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확하게 셈을 치르며 호령하는 그녀의 모습은, 과거 자신이 한양으로 떠나기 전 문간에서 눈물을 훔치던 유약하고 가련했던 그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수백 명의 목숨을 책임지고 천하를 호령하는 맹렬한 장수의 기백,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아아, 나의 어리석음이여. 저 여인은 못난 지아비를 위해 지난 십 년간 험난한 진흙탕을 뒹굴며 저토록 처절하게 세상의 풍파와 맞서 싸워왔거늘. 나는 아직도 이 따뜻한 방구석에 편히 앉아 공자 왈 맹자 왈 헛된 탁상공론과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단 말인가. 학문이란 본디 백성을 살리고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배우는 것인데, 나는 당장 내 가솔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대체 무슨 거창한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저 얄팍하고 무능한 붓 하나에 매달려 있었단 말인가.'

사내는 들고 있던 책을 방바닥에 툭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방구석 궤짝에 고이 모셔두었던, 지난 십 년간 밤을 새워가며 썼던 수백 장의 과거 시험 답안지와 손때 묻은 사서삼경 서책들을 두 팔 가득 한 아름 안아 들고 마당으로 나섰습니다. 마침 가마솥에 불을 지피기 위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부엌의 아궁이 앞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간 사내는, 일말의 망설임이나 미련도 없이 그 엄청난 양의 낡은 종이 무더기를 맹렬한 붉은 불길 속으로 사정없이 던져 넣었습니다. 시퍼렇게 타오르는 불꽃이 사내의 지나간 십 년의 과거와 헛된 망상, 그리고 알량하고 거추장스러운 양반의 껍데기를 남김없이 핥아먹으며 집어삼키고 있었습니다.

마당 한가운데서 숨을 죽인 채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지켜보던 아내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습니다. 사내는 아궁이의 뜨거운 열기를 뒤로한 채, 뚜벅뚜벅 거침없는 걸음으로 아내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그의 맑은 눈빛에는 지난날의 짙은 방황과 짓눌려 있던 패배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실물의 세상을 향한 결연하고 뜨거운 불꽃만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부인. 내게 그 허리춤에 찬 주판을 쥐여주는 법을 가르쳐 주시오. 사서삼경과 수만 자의 한자를 달달 외우던 이 머리로, 이제는 천하의 물화가 흐르는 거대한 길과 백성들의 땀구멍을 외워보겠소. 벼슬길을 향하던 무능한 붓 대신 이문을 창출하는 주판을 쥐고, 공허한 탁상공론 대신 땀내 나는 실물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진짜 백성들이 어찌 살아가는지 그 치열한 삶을 밑바닥부터 배워보려 하오."

아내의 고운 눈가에 왈칵 뜨거운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감격에 겨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허리춤에 소중히 차고 있던 손때 묻은 나무 주판을 풀어 사내의 두 손에 단단하고 묵직하게 쥐여주었습니다.

"서방님의 붓끝이 향하던 천하를 구제하겠다는 그 웅대한 이치가, 이제는 한양의 궁궐 대신 이 상방의 장부 위에서 새롭고 찬란하게 펼쳐질 것입니다. 저는 굳게 믿습니다. 서방님의 그 깊고 넓은 지혜와 올곧은 성정이라면, 단순한 잇속만 차리는 시정잡배가 아니라 헐벗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진정한 거상으로 거듭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 밤부터 사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수십 권의 장부를 뚫어져라 들여다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이문을 계산하고 주판알을 튕기는 것조차 서툴러 진땀을 뺐으나, 천하의 이치를 담은 사서삼경을 통달했던 그의 명석한 두뇌는 금세 놀라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내에게 장사는 단순한 셈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물가에 미치는 날씨와 절기의 변화, 각 지방의 민심과 험준한 산세의 흐름, 심지어 한양 조정의 조세 정책이 각 지역의 시장에 미치는 파급 효과까지 분석했습니다. 사내는 마치 과거 시험을 준비하며 고도의 학문을 탐구하듯 상업의 거대한 원리를 꿰뚫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양반의 낡은 허울을 훌훌 벗어던진 사내의 손끝에서, 작은 주판알이 경쾌하게 튕기며 내는 타닥타닥 소리가 깊은 밤이 새도록 멈추지 않고 울려 퍼졌습니다.

※ 5: 장부의 길에서 마주한 첫 시련, 그리고 두 사람의 굳건한 믿음.

사내가 알량한 체면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상단의 경영에 뛰어든 지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상단의 존립을 흔드는 거대한 시련이 부부의 상방을 무자비하게 덮쳤습니다. 수개월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삼남 지방의 쌀값이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치솟아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이번에 새로 부임한 탐욕스럽고 교활한 관찰사가 이를 빌미로 상단의 쌀 창고를 강제로 봉쇄해버린 것입니다. 지역의 부자들이 매점매석을 하여 굶주린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짠다는 그럴듯한 억지 누명을 씌워, 상단이 보유한 수만 석의 귀한 곡식을 관아로 몰수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고 공을 세우려는 간악한 수작이었습니다.

서슬 퍼런 관아의 포졸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들이닥쳐 상단의 창고 곳곳에 붉은 관인을 쾅쾅 찍어대고, 애꿎은 상단의 일꾼들을 거친 밧줄로 굴비 엮듯 포박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생을 피땀 흘려 일궈온 거대한 상방이 하루아침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공중분해 될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그간 철의 여인처럼 굳건했던 아내조차 파랗게 질린 입술을 파르르 떨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주변의 다른 상단들은 관찰사의 무자비한 권력과 칼춤 앞에 납작 엎드려 뒷돈을 바치고 목숨을 구걸하기에 급급한 실정이었습니다.

"부인, 너무 염려 마시오. 우리가 지은 죄가 없는데 어찌 두려워하겠소. 이 일은 십 년간 법을 공부한 내게 온전히 맡겨 두시구려."

사내는 흔들림 없이 깊고 든든한 목소리로 아내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정하게 안심시켰습니다. 그는 쌀가루와 먼지가 뽀얗게 쌓인 상인의 낡은 옷 대신,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해 두었던 옥색의 단정한 명주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당당한 걸음으로 관아를 향해 나섰습니다. 비록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이 내린 붉은 관복을 입지는 못했으나, 십 년간 한양의 좁은 방에서 대명률과 경국대전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달달 외웠던 법률의 대가가 바로 그였습니다. 사내는 기세등등하게 거들먹거리는 관찰사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서서 쩌렁쩌렁하게 동헌이 울리도록 목소리를 높여 입을 열었습니다.

"사또의 백성을 어여삐 여기시는 깊은 뜻은 짐작하오나, 멀쩡한 상단의 창고를 적법한 절차 없이 봉쇄하는 것은 명백히 나라의 법도에 어긋나는 권력 남용의 처사가 아닙니까! 대명률과 경국대전 호전(戶典)의 엄격한 규정에 이르기를, 흉년에 굶주린 백성의 구휼은 상인들의 재산을 강탈할 것이 아니라 관아의 창고를 먼저 열어 빈민을 돕는 것이 나라의 마땅한 도리라 명시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저희 상단은 지난 십 년간 단 한 번도 곡식의 이문으로 폭리를 취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매년 보릿고개 춘궁기마다 이자를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빈민들에게 곡식을 대여해주어 굶주린 자들을 구제해 온 명백한 장부와 백성들의 증언이 존재합니다!"

관찰사는 그저 글자나 겨우 읽고 주판이나 튕기는 일개 무식한 장사치인 줄 알았던 사내의 입에서, 청산유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법전의 정확한 구절구절에 당황하여 헛기침을 연발하며 수염만 쓰다듬었습니다. 사내는 그 당황한 기색을 놓치지 않고 기세를 몰아, 품속에서 묵직한 서찰 뭉치 하나를 꺼내어 관찰사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습니다.

"이 서찰들을 보시지요. 이것은 한양의 육조거리에 있는 대행수들과, 현재 조정의 살림을 책임지는 호조 판서 대감 댁에 드나드는 객주들과 제가 직접 주고받은 서신들입니다. 이번 가뭄의 징조를 미리 읽고 저희 상단이 곡식을 대량으로 사들인 것은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싼값에 구휼미를 풀기 위해, 한양의 객주들과 십시일반 뜻을 모아 미리 준비해 둔 것입니다. 만약 사또께서 무력으로 창고를 봉쇄하고 억지를 부려 이 곡식들을 썩게 만드신다면, 이는 임금님의 백성을 구휼하려는 상단과 호조의 갸륵한 충정을 짓밟는 역모와도 같은 짓입니다.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의 그 끔찍한 원성과 조정의 문책은 고스란히 사또의 목을 조이게 될 것입니다!"

사내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논리 정연한 법적 압박과, 한양 최고위층의 거대한 인맥을 교묘하게 들먹이는 놀라운 기지에, 결국 관찰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서둘러 포졸들을 물리고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내는 이 커다란 위기를 완벽한 역전의 기회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관아와 정식으로 협력하여 상단의 곡식을 시장 가격보다 훨씬 싼값에 공정하게 백성들에게 풀기로 합의하고, 그 엄청난 구휼의 대가로 훗날 관아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독점으로 납품할 수 있는 막강하고 든든한 관허(官許)를 당당히 얻어낸 것입니다.

사내가 관아의 높은 문턱을 넘어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빠져나오자, 밖에서 애타게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던 아내가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으며 달려왔습니다. 사내는 아내의 등을 따뜻하고 넓은 가슴으로 꽉 감싸 안았습니다.

"보았소, 부인? 내가 십 년 동안 그 어두운 고시원에서 청춘을 바쳐가며 썩어가며 읽었던 그 수많은 책들이, 그저 아궁이의 불쏘시개나 땔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오. 비록 내가 관운이 없어 벼슬길에 올라 권력을 쥐지는 못했으나, 이 치열한 장부의 길에서 내 지식으로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구하고 우리의 핏줄 같은 가업을 지켜냈으니, 이 또한 대장부가 세상을 살아가는 참으로 떳떳하고 의미 있는 방도가 아니겠소."

아내는 벅차오르는 감동에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사내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오직 힘과 돈의 차갑고 비정한 논리만이 지배하던 거친 상업의 세계에, 사내의 깊은 철학적 지혜와 올곧은 법적 학문이 더해지자 부부의 상방은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단단하고 위대한 반석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완벽하게 채워주며 세상을 이롭게 하는, 세상 둘도 없는 든든한 동반자이자 거상으로 우뚝 섰습니다.

※ 6: 거상으로 우뚝 선 부부, 한양을 호령하며 고향에 베푸는 찬란한 여생.

그 거대한 가뭄의 위기를 지혜롭게 넘긴 후로부터 다시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다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훌쩍 흘렀습니다. 젊은 시절 과거에 세 번이나 낙방하여 짐승 같은 거지꼴로 밤도둑처럼 고향에 숨어들었던 사내와, 그런 못난 남편을 원망 한마디 없이 굳건하게 믿고 묵묵히 기다려주었던 여인은 이제 조선 팔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전설적이고 경이로운 거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부가 이끄는 상단은 한양 육의전의 콧대 높은 대행수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굽신거릴 만큼 거대한 부와 명예, 그리고 백성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동시에 이루어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평상시 삶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어 기생집을 들락거리며 비단옷을 휘감고 거들먹거리는 졸부들의 천박한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사내는 과거의 자신처럼 집안이 가난하여 글공부를 포기해야만 하는 총명하고 어린 학동들을 위해, 고향 마을에서 가장 양지바르고 좋은 터에 거대한 서당을 세워 무상으로 글을 가르쳤습니다. 아내는 매년 삭풍이 매섭게 부는 혹독한 겨울이 오기 전이면 최고급 솜옷과 막대한 양의 쌀을 넉넉히 풀어, 주변 마을의 가난한 이웃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떨다 얼어 죽는 일이 결코 없도록 어머니의 마음으로 살뜰히 살폈습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본디 사람의 분뇨와 같아서 한곳에 고집스럽게 모아두면 썩은 악취가 진동하고 병을 부르지만, 넓은 밭에 골고루 흩뿌리면 천하의 만물을 살리고 꽃을 피우는 귀한 거름이 된다'는 것이 이들 부부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굳건하고도 고결한 상도(商道)의 철학이었습니다.

어느 맑고 청명한 가을날 해 질 녘, 어느덧 머리에 하얀 백발이 성성해진 노부부는 뒷산 중턱에 단출하게 지어진 고즈넉한 정자에 나란히 앉아, 자신들의 손길이 닿아 풍요로워진 마을을 평화롭게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바람결에 일렁이는 황금빛으로 물든 풍요로운 들녘과, 초가집 굴뚝마다 구수한 밥 짓는 냄새를 풍기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가 한 폭의 수묵담채화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사내가 세월의 거친 흔적이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남은 주름진 아내의 손을 가만히 쥐며 인자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습니다.

"부인. 내 가끔 이리 앉아 세월을 돌아보며 그런 실없는 상상을 하곤 하오. 만약 내가 그 옛날 억세게 운이 좋아 과거에 덜컥 급제하여, 한양에서 떵떵거리는 붉은 관복을 입은 벼슬아치가 되었더라면, 과연 내 인생이 어찌 흘러갔을까 하고 말이오."

아내가 눈가에 고운 주름을 지으며 소녀처럼 빙긋 웃고는 사내의 얼굴을 다정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서방님 생각에는 어찌 되셨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그 피비린내 나고 진흙탕 같은 붕당의 권력 싸움질에 무고하게 휘말려 일찌감치 이름 모를 외딴섬으로 귀양을 가 조용히 잊혀졌거나, 아니면 불의를 참지 못하는 내 이 꼿꼿한 성정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울화통이 터져 화병으로 일찍 세상을 등졌을 게요. 이리 부인과 마주 앉아 평화롭고 따스한 노년을 보내며, 내 손으로 직접 헐벗은 사람들의 배를 불리고 생명을 살리는 이 벅차오르는 기쁨은 평생 알지 못한 채 눈을 감았겠지."

사내의 깊고 맑은 눈길이 아득하게 펼쳐진 붉은 노을 진 한양 하늘을 향했습니다. 십 년의 눈부신 청춘을 남김없이 바쳤으나 철저하게 자신을 버리고 냉정하게 외면했던 그곳. 한때는 지독한 원망과 뼈저린 회한으로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그 하늘이 이제는 더없이 맑고 평온하고, 심지어 고맙게만 느껴졌습니다. 사내에게 진정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이란 임금이 내리는 붉은 관복과 화려한 사모관대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손가락질할 때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단 한 사람의 곁에서, 스스로의 정당한 땀과 지혜로운 힘으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지금의 이 삶이야말로 그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진정한 성공이자 완전한 행복이었습니다.

"내 삶의 모든 영광과 평안은 다 부인 덕분이오. 추운 겨울밤 거리에 버려져 꽁꽁 얼어 죽어가는 가엾은 나비에게 봄날의 눈부시게 따스한 품을 기꺼이 내어주고, 처참하게 꺾인 날개를 다시 쫙 펴고 저 높은 푸른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게 보듬어준 것은 오직 부인 하나뿐이었소. 만약 내게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그다음 생이 다시 온다 하여도, 나는 차가운 과거 시험장 대신 부인이 따뜻한 밥을 안고 기다리는 이 사립문 앞으로 가장 먼저, 숨이 차도록 달려올 것이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눈가에 촉촉한 이슬을 매단 채 사내의 든든한 어깨에 살며시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습니다. 부드러운 가을 바람결에 사각거리며 흔들리는 솔잎 소리가 마치 두 사람의 평온하고 아름다운 황혼을 축복하는 대자연의 노래처럼 잔잔하게 산자락에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편협한 잣대로는 철저히 실패하고 버림받은 선비였으나 진정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참된 학문의 길을 상업에서 찾은 사내, 그리고 그런 지아비를 무한한 신뢰와 가슴으로 품어 기다린 지혜롭고 강인한 여인. 먼 길을 험난하게 돌아 비로소 서로의 완벽한 짝이 된 부부의 이 전설 같은 사랑과 기적의 이야기는,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 강산이 수백 번 바뀌어도 고향 사람들의 입을 타고 가슴 뭉클하고 따뜻한 양반 야담이 되어 아주 오래도록, 아름답게 전해져 내려갔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시청자 여러분, 오늘 들려드린 옛이야기 어떠셨나요? 세상이 정해놓은 출세의 길이 아니더라도, 곁에서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꺾인 붓 대신 주판을 쥐고 새로운 세상을 연 사내처럼, 우리 구독자님들의 삶에도 늘 따뜻한 희망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따뜻한 댓글 부탁드립니다. 다음에도 재미있는 양반야담으로 찾아오겠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