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백정과 규수, 금기를 깨다 [계서야담]
눈먼 백정과 규수, 금기를 깨다 [계서야담]
부제
역병으로 시력을 잃은 백정과 몰락한 양반가의 딸이 부부의 연을 맺고 서로의 눈과 발이 되어 살아가던 중, 숨겨진 명의의 비방을 얻어 눈을 뜨고 큰 부를 이룩하는 기적 같은 사연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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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몰락한 양반가의 여식은 모두의 손가락질을 무릅쓰고 눈먼 백정과 혼인했습니다. 그런데 앞을 못 보는 사내가 간직해 온 낡은 칼집에서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명의의 비방이 발견됩니다. 서로의 눈과 발이 되어 준 두 사람에게 과연 어떤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 1: 기울어진 대문 앞에 찾아온 사람
한양에서 남쪽으로 사흘을 내려가면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고을이 있었다. 그곳에는 한때 기와집 열두 칸과 논 서른 마지기를 거느렸던 윤씨 집안이 살았다. 윤씨 집안의 가장 윤진사는 글과 예법을 중히 여겼으나 세상 물정에는 어두웠고, 남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몇 해 전 가까운 친척의 보증을 섰다가 큰 빚을 떠안은 데다 흉년까지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고을에 무서운 역병이 퍼지면서 집안의 종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윤진사마저 병석에 눕고 말았다.
윤진사에게는 서연이라는 외동딸이 있었다. 서연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고 바느질과 살림에도 능했다. 쪽진머리에 비녀를 꽂고 고운 비단옷을 입으면 누구라도 양반가 규수라 알아보았지만, 집안이 기운 뒤로는 빛바랜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고 직접 우물물을 길었다.
집안 곳간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빚쟁이에게 넘어갔고, 남은 것은 비가 새는 안채 세 칸과 잡초 무성한 마당뿐이었다. 서연은 낮에는 삯바느질을 하고 밤에는 약초를 달여 아버지의 병상을 지켰다.
“아버님, 약 드실 시각입니다.”
“그 약을 그만 달이거라. 쌀 한 줌도 아쉬운 집에서 늙은 사람 목숨을 붙들어 무엇 하겠느냐.”
“저를 두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의원이 꾸준히 드시면 차도가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의원에게 줄 약값도 밀렸을 텐데 어찌 또 약을 지었느냐?”
서연은 대답 대신 약사발을 아버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사실 약재상에서는 더 이상 외상을 줄 수 없다며 문전박대했다. 그날 달인 것은 약이 아니라 산에서 뜯어 온 질경이와 말린 무청뿐이었다.
윤진사는 한 모금을 마시고는 딸의 거칠어진 손을 보았다. 바늘에 찔린 자국과 장작을 패다 생긴 상처가 고운 손등을 가득 덮고 있었다.
“내가 못난 아비라 네 혼사까지 막았구나.”
“혼인이 지금 무슨 소용입니까? 아버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것이 먼저입니다.”
“집안이 이 꼴이 되자 혼담을 넣던 자들이 모두 등을 돌렸다. 너를 첩으로라도 달라는 늙은 부자만 남았으니, 내 어찌 눈을 감겠느냐.”
서연은 아버지를 안심시키려 웃었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사흘 뒤까지 빚을 갚지 않으면 안채마저 내놓아야 했다. 빚쟁이인 최참봉은 고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고, 서연을 자신의 후실로 들이려는 속셈을 품고 있었다.
그날 오후 최참봉이 장정들을 거느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허락도 없이 안채 마루에 올라 집 안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돈을 마련하지 못했느냐?”
“약속하신 날까지 사흘이 남았습니다.”
“사흘 뒤라고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지겠느냐? 네가 마음만 정하면 빚문서는 당장 불태워 주마.”
“마음을 정하라니 무슨 뜻입니까?”
“내 집으로 들어오라는 뜻이지. 정실 자리는 아니어도 굶주릴 일은 없게 해 주겠다. 병든 아비에게도 좋은 약을 써 주마.”
서연은 치욕에 손끝이 떨렸지만 허리를 곧게 폈다.
“가난하다고 하여 사람의 마음까지 돈으로 사실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최참봉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빚문서를 서연의 발치에 던졌다.
“사흘 뒤에도 그 기개가 남아 있는지 보자. 그날은 이 집 기둥까지 뽑아 갈 것이다.”
장정들이 대문을 나서자 윤진사의 기침이 담장 밖까지 들렸다. 서연은 땅에 떨어진 빚문서를 주워 가슴에 품었다.
'집을 잃더라도 저자의 첩으로는 들어가지 않겠다. 하지만 아버님을 어디로 모셔야 한단 말인가.'
그날 밤 윤진사의 병세가 갑자기 위중해졌다. 열이 불덩이처럼 오르고 숨소리는 가늘어졌다. 서연은 의원을 부르려고 장옷을 걸쳤지만 역병을 두려워한 의원들은 윤씨 집안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서연은 어두운 골목을 뛰어다니며 문을 두드렸다.
“제발 아버님을 한 번만 살펴봐 주십시오. 약값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겠습니다.”
“우리 집에도 아이들이 있소. 역병 환자에게 갔다가 옮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이오?”
대문들은 하나같이 닫혔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서연이 낙심해 약방 처마 밑에 주저앉았을 때, 골목 끝에서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도롱이를 걸친 사내가 빗속을 더듬으며 다가왔다. 체격은 건장했지만 두 눈은 흐린 막으로 덮여 있었고, 손에는 매듭이 촘촘히 묶인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누가 울고 있습니까?”
서연은 급히 눈물을 닦았다.
“집에 병자가 있는데 의원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열이 높고 숨이 가쁘며 손발이 차갑습니까?”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역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세입니다. 찬물을 먹이지 말고, 마른 쑥과 생강을 달여 조금씩 먹여야 합니다.”
사내는 품에서 약초 꾸러미를 꺼냈다. 자신에게 닥칠 병을 막으려고 어렵게 구한 약초였으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서연에게 건넸다.
“이것을 가져가십시오.”
“처음 뵙는 분의 귀한 약초를 거저 받을 수는 없습니다.”
“목숨이 오가는 때에는 귀하고 천한 것을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우선 사람부터 살려야지요.”
서연은 사내를 집으로 데려갔다. 그는 앞을 보지 못했지만 환자의 숨소리와 맥을 짚는 데 익숙했다. 서연에게 물을 끓이고 방 안에 마른 숯을 두라고 일러 주었으며, 윤진사의 몸을 따뜻한 천으로 감싸게 했다.
밤새 약초를 달여 먹이자 새벽 무렵 윤진사의 열이 조금 내렸다. 서연은 사내 앞에 깊이 머리를 숙였다.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존함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쇠백정 만복이라 합니다.”
서연은 뜻밖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백정이라면 소와 돼지를 잡고 가죽을 다루는 천역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만복은 역병으로 눈까지 잃은 처지였다.
“백정이 양반댁 안채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실 것입니다. 날이 밝기 전에 물러가겠습니다.”
만복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그때 정신을 되찾은 윤진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잠시 기다리게. 자네가 내 목숨을 구했으니 어찌 이름만 듣고 보내겠는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를 살린 손이 백정의 손이면 어떻고, 양반의 손이면 또 어떠한가. 은혜를 입고도 신분을 따진다면 내가 읽은 성현의 글이 모두 헛것이지.”
만복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굳은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날 낮, 만복이 윤씨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본 이웃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졌다. 양반가 여식이 눈먼 백정을 안채에 들였다는 말은 해가 지기도 전에 최참봉의 귀에 들어갔다.
최참봉은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찾아왔다.
“가문의 체면이 땅에 떨어졌구나. 백정 사내와 밤을 함께 보냈다는 소문이 온 고을에 퍼졌으니 이제 어느 양반이 너를 며느리로 맞겠느냐?”
“병든 아버님을 살리려고 도움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 말을 누가 믿어 주겠느냐? 내 후실로 들어올 마지막 기회마저 걷어찼으니, 내일 당장 집을 비워라.”
최참봉은 사흘이 남은 약속까지 무시하고 장정들에게 곳간 문을 봉하라고 명했다. 그때 대문 밖에서 지팡이 소리가 들렸다.
만복이 작은 돈주머니를 들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의 낡은 옷에서는 빗물과 약초 냄새가 났다.
“그 빚, 제가 갚겠습니다.”
사람들은 한순간 말을 잃었다. 이내 최참봉이 배를 잡고 웃었다.
“눈먼 백정 주제에 양반집 빚을 갚겠다고?”
“가죽을 팔아 모은 돈과 부모님이 남긴 집을 처분하면 일부는 갚을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일을 해서 갚겠습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어찌 그 많은 빚을 대신 갚는단 말이냐?”
최참봉이 비웃으며 묻자 만복은 흐린 두 눈을 서연이 서 있는 쪽으로 향했다.
“아무 사이가 아니어서 안 된다면, 부부가 되면 되겠습니까?”
마당에 모인 사람들이 술렁였다. 서연은 놀라 만복을 바라보았고, 병석의 윤진사는 신음처럼 긴 숨을 내쉬었다.
눈먼 백정이 몰락한 양반가의 여식에게 청혼한 순간이었다.
※ 2: 가문보다 무거운 한 사람의 마음
만복의 말이 떨어지자 마당은 벌집을 건드린 듯 소란스러워졌다. 최참봉과 장정들은 대놓고 비웃었고, 담장 밖에 모인 이웃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수군거렸다.
“백정이 양반가 규수에게 혼인을 청하다니 세상이 뒤집혔구나.”
“눈까지 멀었으니 제 처지를 보지 못하는 게지.”
“아무리 집안이 망했어도 양반의 피가 어디로 가겠나?”
모욕적인 말이 쏟아졌지만 만복은 묵묵히 서 있었다. 손에 든 지팡이가 떨리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두렵고 부끄러울 터였다. 그런데도 돈주머니를 거두거나 말을 바꾸지 않았다.
서연은 만복에게 다가갔다.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십니까? 저와 아버님을 도우려다 평생 모은 것까지 잃게 됩니다.”
“아버님께서 역병으로 돌아가신 뒤 저도 그 병에 걸렸습니다. 열흘을 앓고 살아났지만 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지요. 사람들이 병이 옮는다며 저를 외양간에 버렸을 때, 이름 모를 노인이 죽과 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노인께 은혜를 갚으려는 것입니까?”
“눈을 잃은 뒤에야 보이는 것도 있었습니다. 신분이 높다는 사람은 저를 피해 달아났고, 가진 것 없던 노인은 제 곁을 지켰습니다. 그날부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혼인은 은혜만으로 맺을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낭자를 곤경에서 구하려고 혼인을 핑계 삼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만복은 숨을 고른 뒤 솔직하게 말을 이었다.
“지난밤 낭자는 제가 백정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약초를 내던지지 않았습니다. 제 손이 더럽다며 물러서지도 않았고, 눈먼 사람이라고 불쌍히 여기며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고마웠습니다.”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복의 청혼은 양반가 여식을 얻으려는 욕심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만용도 아니었다. 신분 때문에 짓밟히는 자신과 서연의 처지가 다르지 않음을 알고 내민 손이었다.
최참봉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혼인을 하든 말든 빚은 빚이다. 내일까지 전부 갚지 못하면 이 집은 내 것이야.”
“빚문서를 보여 주십시오.”
만복이 손을 내밀었다. 최참봉이 코웃음을 치며 문서를 던지자 서연이 그것을 주워 대신 읽었다. 원금은 열 냥이었으나 몇 년 사이 이자가 붙어 서른 냥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자는 매달 한 냥씩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
“아버님께서 처음 보증을 서실 때 받은 문서와 다릅니다. 숫자 위에 먹을 덧칠한 흔적이 있습니다.”
최참봉의 얼굴이 굳었다. 서연은 문서를 햇빛에 비추었다. 종이 뒤로 번진 먹의 모양이 다른 글자와 달랐다.
“원래 이자는 석 달에 한 냥이었습니다. 누군가 문서를 고쳐 빚을 부풀렸습니다.”
“감히 나를 사기꾼으로 모는 것이냐?”
최참봉이 문서를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만복은 보이지 않는데도 발소리를 듣고 지팡이로 그의 손목을 막았다.
“관아에 가서 원본 장부와 대조하면 밝혀질 일입니다.”
“백정이 관아를 입에 올려?”
“백정이라 글은 모르지만 거짓말이 죄라는 것쯤은 압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최참봉은 수치심에 입술을 떨었다. 일이 관아로 넘어가면 문서를 고친 죄가 드러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원금과 정해진 이자만 받는 조건으로 한발 물러났다.
만복이 가져온 돈과 서연이 마지막 비녀를 팔아 마련한 돈을 합치자 빚의 절반을 갚을 수 있었다. 남은 돈은 반년 안에 갚기로 하고 안채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최참봉은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양반집 딸이 백정과 혼인한다는 말을 제 입으로 했으니 반드시 지켜라. 혼인을 물리면 오늘 합의도 없던 일로 하겠다.”
그가 떠난 뒤 윤씨 집안의 먼 친척들이 몰려왔다. 집안이 기울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이들이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차라리 늙은 부자의 첩으로 들어갈지언정 백정의 아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혼인을 막고 싶으시다면 남은 빚을 대신 갚아 주시겠습니까?”
서연의 질문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돈이 없다고 가문의 법도까지 팔겠다는 것이냐?”
“제가 굶을 때 쌀 한 되 가져오지 않으신 분들이 이제 와 가문을 말씀하십니까?”
“어른에게 말버릇이 그것이냐?”
“아버님이 역병에 걸리셨을 때 문밖에서 안부를 물은 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백정이라 손가락질하시는 저 사람은 자신의 약초를 내주고 밤새 병상을 지켰습니다. 사람의 귀천을 성씨와 직업으로만 가른다면 그런 법도가 무슨 소용입니까?”
친척들은 서연을 꾸짖다가 윤씨 문중에서 이름을 지우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마당이 조용해지자 윤진사가 딸을 불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네게 백정의 아내가 되라고 강요할 수 없다. 빚은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다른 방법이 정말 남아 있습니까?”
윤진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연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양반가 여식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백정의 아내가 되면 평생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었다. 아이를 낳아도 천대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만복을 거의 알지 못했다.
새벽녘, 마당에서 장작 패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 보니 만복이 흐린 눈으로 나뭇결을 더듬으며 도끼질하고 있었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젖은 장작뿐이라 불이 잘 붙지 않을 듯해 마른 속을 쪼개고 있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 어찌 그리 정확히 도끼를 쓰십니까?”
“눈을 잃었다고 손과 귀까지 잃은 것은 아닙니다.”
만복은 도끼를 내려놓았다.
“어제의 청혼은 잊으십시오. 낭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최참봉이 뭐라 하든 제가 관아에 가서 사실을 밝히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혼인도 하지 않은 남의 집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잃게 됩니다.”
“재물은 다시 모으면 됩니다. 하지만 억지로 혼인한 사람의 세월은 돌려줄 수 없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연의 마음이 움직였다. 만복은 가난했고 눈이 보이지 않았으며 세상에서 낮은 신분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상대의 뜻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서연은 윤진사의 허락을 받아 만복과 혼인하기로 했다. 거창한 예물도 잔치도 없었다. 붉은 치마 한 벌을 빌리고 낡은 초례상에 대추와 밤을 올린 것이 전부였다.
혼례 날 구경꾼들은 두 사람을 보며 비웃었다. 그러나 만복은 서연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없어도 그녀를 향해 정중히 절했다. 서연 역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좋은 집과 편한 삶은 약속드리지 못합니다.”
“저도 지체 높은 가문의 영화는 드리지 못합니다.”
“그 대신 굶더라도 혼자 굶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길을 잃으면 제가 손을 잡아 드리겠습니다.”
“제가 앞을 보지 못하니 낭자가 제 눈이 되어 주십시오.”
“제게 험한 길이 닥치면 당신께서 제 발이 되어 주십시오.”
두 사람은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윤진사는 딸이 혼인한 지 한 달 만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서연과 만복은 정성껏 장례를 치렀고, 남은 안채를 팔아 빚을 모두 갚았다. 손에 남은 것은 낡은 이불과 솥 하나, 만복이 사용하던 칼과 지팡이뿐이었다.
부부는 마을에서 떨어진 산기슭의 빈 초가로 거처를 옮겼다. 지붕은 군데군데 뚫려 있었고 문짝은 바람이 불 때마다 덜컹거렸다.
첫날 밤, 서연이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막고 있는데 만복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후회하지 않습니까?”
서연은 한동안 초라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비단 이불도 몸종도 없었지만, 최참봉의 눈치를 보거나 친척의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었다.
“좋은 집을 떠난 것이 아니라 빚에 눌린 집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니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가 평생 눈을 뜨지 못하더라도 말입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사람을 보고도 사람답게 대하지 않는 눈이 더 부끄러운 것이지요.”
만복은 말없이 서연의 손을 찾았다. 굳은살 박인 두 손이 맞닿았다.
두 사람은 가진 것이 거의 없었으나 그날부터 서로의 부족한 곳을 채우며 한집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 3: 낡은 칼집에 숨겨진 글
만복과 서연의 살림은 몹시 가난했다. 산기슭의 밭은 돌이 많아 곡식이 제대로 자라지 않았고, 초가 주변에는 장터로 통하는 길도 없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땔감과 식량을 마련하지 못하면 굶주림을 피하기 어려웠다.
만복은 눈을 잃기 전까지 아버지에게 고기 손질과 가죽 다루는 법을 배웠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뒤에도 손끝의 감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짐승의 가죽을 만지는 것만으로 상한 부분을 찾아냈고, 칼날이 살과 뼈에 닿는 소리만 듣고도 깊이를 헤아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먼 사람에게 일을 맡기기를 꺼렸다.
“칼을 잘못 휘둘러 손님이라도 다치게 하면 누가 책임지겠나?”
“백정이면서 장님까지 되었으니 다른 일을 알아보게.”
장터에서 번번이 거절당한 만복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 가까이 오면 일부러 발걸음을 가볍게 했지만 서연은 지팡이 끄는 소리만 듣고도 남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오늘도 일을 구하지 못하셨습니까?”
“내일부터는 장작을 패서 팔아 보겠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 홀로 산에서 도끼를 쓰면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낭자만 일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이제 낭자가 아니라 아내입니다. 부부가 함께 일하는 것이 어찌 한 사람만의 일이겠습니까?”
서연은 만복과 함께 장터로 나갔다. 그녀는 가죽의 빛깔과 흠집을 살폈고, 만복은 손으로 두께와 질을 확인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치자 상인들이 속이려고 내민 상한 가죽도 금세 가려낼 수 있었다.
서연은 남은 가죽 조각으로 돈주머니와 신발 깔개를 만들었다. 양반가에서 익힌 바느질 솜씨 덕분에 모양이 단정했고 매듭도 튼튼했다. 만복은 작은 가죽 조각을 일정한 크기로 자르고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다듬었다.
처음에는 백정이 만든 물건이라며 외면하던 사람들도 값이 싸고 튼튼하다는 것을 알고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만복은 손님이 값을 더 내면 소리만 듣고도 엽전을 헤아려 반드시 돌려주었다.
“눈도 보이지 않는데 한 닢쯤 모른 체하면 누가 알겠소?”
“제 눈은 보이지 않아도 하늘의 눈까지 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대답이 퍼지면서 두 사람은 조금씩 신뢰를 얻었다.
서연은 만복이 길을 걸을 때 오른팔을 잡게 했다. 돌부리가 있으면 손가락을 한 번 눌렀고, 내리막이 나오면 두 번 눌렀다. 좁은 길에서는 만복이 앞장서 지팡이로 뱀과 웅덩이를 확인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둘을 비웃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서로의 눈과 발이 되어 걷는 부부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어느 날 장에서 돌아오던 길에 폭우가 쏟아졌다. 냇물이 갑자기 불어나 징검다리가 잠겼다. 서연이 건널 곳을 찾으려다 진흙에 발이 미끄러졌다.
“조심하십시오!”
만복은 물소리만 듣고 아내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지팡이로 바닥의 깊이를 재며 서연을 등에 업었다.
“물이 거셉니다. 내려놓으십시오. 함께 휩쓸릴 수 있습니다.”
“낭자가 제 눈이 되어 주었으니 오늘은 제가 낭자의 발이 되겠습니다. 왼쪽과 오른쪽만 알려 주십시오.”
“오른쪽으로 반걸음 가세요. 앞에 큰 돌이 있습니다.”
만복은 서연의 지시에 따라 한 걸음씩 냇물을 건넜다. 두 사람은 흠뻑 젖었지만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그날 밤 서연은 젖은 물건을 말리다가 만복의 오래된 칼집에 금이 간 것을 발견했다. 칼집은 검은 가죽으로 덮여 있었고, 손잡이 가까운 곳에 흐릿한 매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 칼은 누가 쓰던 것입니까?”
“아버님께서 남기신 것입니다. 그전에는 할아버님이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백정이 쓰는 칼집에 매화 문양이라니 이상합니다.”
“어머니께서도 칼보다 칼집을 더 소중히 다루셨습니다. 아무리 낡아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지요.”
서연은 갈라진 부분을 꿰매려고 칼을 뽑았다. 그런데 칼집 안쪽에서 종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다.”
“가죽을 덧댄 조각 아닙니까?”
서연이 얇은 대나무 꼬챙이로 안쪽을 조심스럽게 밀자 누렇게 바랜 종이뭉치가 빠져나왔다. 기름을 먹여 여러 겹 접은 종이는 피와 습기에 젖고도 썩지 않았다.
등잔불 아래에서 펼쳐 보니 깨알 같은 글씨와 사람의 눈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글 사이에는 산과 골짜기를 표시한 지도, 약초의 잎과 뿌리를 구별하는 그림도 있었다.
서연은 첫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청명산인 백운이 눈병을 다스리는 법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긴다.”
만복의 얼굴이 굳었다.
“백운이라고 했습니까?”
“아는 이름입니까?”
“역병에 걸린 저를 돌봐 주었던 노인이 자신을 백운이라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떠돌이 약초꾼으로만 알았지만, 죽은 사람도 살려 냈다는 명의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다음 줄을 읽었다.
“눈앞이 흰 안개로 덮이고 동공이 빛을 잃었으나 눈동자 안에 불씨가 남은 자는, 세 가지 약재와 한 가지 맑은 물로 다시 빛을 찾을 수 있다.”
만복은 숨을 멈춘 채 자신의 눈을 만졌다. 역병을 앓은 뒤 그의 눈앞은 짙은 안개로 가려졌지만, 밝은 햇빛 아래에서는 희미한 붉은 기운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정말 내 눈에도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것일까.'
서연은 약방문을 계속 살폈다. 첫 번째 약재는 백 년 묵은 소나무의 동쪽 뿌리 아래에서 자라는 청명초였다. 두 번째는 달빛을 받고 피어난다는 설화목의 꽃술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약재가 적힌 부분에는 검은 얼룩이 번져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로 경고가 적혀 있었다.
“약재 하나라도 잘못 쓰면 빛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남은 눈의 불씨마저 영영 꺼지리라.”
서연은 가슴이 철렁하여 종이를 내려놓았다.
“확실하지 않은 비방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나도 압니다. 지금처럼 살아도 불행하지 않습니다. 괜한 욕심으로 목숨까지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복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종이를 향한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바람이 어려 있었다. 그는 아내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혼례 때 입었던 붉은 치마도, 함께 걷던 산과 냇물도 오직 말과 소리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단 한 번은 낭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습니다.”
서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눈을 뜨신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보고 싶으십니까?”
“해도 산도 아닙니다. 나 같은 사람의 손을 잡아 준 낭자의 얼굴을 가장 먼저 보고 싶습니다.”
그날 이후 서연은 장터에 나갈 때마다 오래된 의서와 약초꾼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청명초를 보았다는 사람은 있어도 설화목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더구나 검게 지워진 세 번째 약재는 이름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며칠 뒤, 서연은 약방문을 햇빛에 비추어 보다가 종이 뒷면에 또 다른 글씨가 숨어 있음을 발견했다. 들기름을 먹인 종이가 빛을 받자 앞에서는 보이지 않던 붉은 글씨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곳에는 세 번째 약재의 이름 대신 사람 얼굴을 닮은 산봉우리와 무덤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무덤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비방의 마지막 약재는 죽은 자의 품에 맡겼으니, 눈을 고치려는 자는 먼저 마음의 눈이 밝음을 증명하라.
그 아래에는 날짜와 함께 낯익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윤 진사에게 이 약방문을 맡긴다.
서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죽은 아버지의 이름이 어째서 만복 집안의 낡은 칼집 속 비방에 적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집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초가 앞에 말을 세우더니 거칠게 대문을 두드렸다.
“이 집에 백운 선생의 약방문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순순히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서연은 서둘러 종이를 접었고, 만복은 오래된 칼을 손에 쥐었다. 두 사람이 비방을 발견한 지 불과 사흘 만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찾아온 것이었다.
※ 4: 죽은 자의 품에 감춰진 약재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낡은 문짝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흔들렸다. 서연은 약방문을 기름종이에 싸서 저고리 안에 감추었다. 만복은 칼을 뽑지 않은 채 칼집째 손에 쥐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밖에 다섯 명이 있습니다. 대문 앞에 셋, 담장 옆에 둘입니다.”
“보이지 않는데 어찌 아십니까?”
“숨소리와 발소리가 다릅니다. 말을 끌고 온 자까지 합하면 여섯입니다.”
밖에서 낯선 사내가 다시 소리쳤다.
“나는 한양에서 내려온 의원 허준식이다. 그 비방은 백정 따위가 가질 물건이 아니니 당장 내놓아라!”
허준식은 고을 수령의 병을 고쳤다며 이름을 얻은 의원이었다. 그러나 비싼 약을 팔아 가난한 백성을 울리고, 다른 의원의 처방을 훔쳐 자신의 비방처럼 꾸민다는 소문도 있었다.
“약방문을 찾은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을까요?”
“장터에서 의서를 물어볼 때 누군가 낭자를 지켜본 모양입니다.”
만복은 서연의 손을 잡아 부엌 뒤쪽으로 이끌었다. 초가 뒤에는 나무를 나르려고 만든 좁은 구멍이 있었다. 두 사람은 그곳으로 빠져나가 대숲으로 몸을 숨겼다.
곧 대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사내들은 집 안의 장롱과 항아리를 깨뜨리고 온 방을 뒤졌다. 허준식은 약방문을 찾지 못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백정은 눈이 멀었고 계집은 산길에 익숙하지 않다. 반드시 찾아라!”
서연은 만복의 손을 끌고 대숲 뒤 오솔길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말발굽 소리가 뒤따라왔다. 평소라면 만복이 지팡이로 길을 확인했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앞에 갈림길이 있습니다.”
“오른쪽은 냇가로 이어지고 왼쪽은 돌산입니다. 냇가로 갑시다. 물속으로 걸으면 발자국과 냄새를 감출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차가운 냇물 속을 거슬러 올라갔다. 만복은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물살의 방향과 바닥의 돌을 발로 더듬어 서연이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았다.
한참 뒤 추격자들의 소리가 멀어졌다. 부부는 산중의 버려진 숯막에서 밤을 보냈다. 서연은 젖은 약방문을 불가에 말리며 뒷면의 그림을 살폈다.
사람 얼굴처럼 생긴 봉우리 아래에 무덤 하나가 있었다. 봉우리 옆에는 매화 다섯 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아버님께서 살아 계실 때 매화봉 아래에 오래된 서책을 묻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 산소와 가까운 곳입니까?”
“같은 산자락이지만 반대편입니다. 어쩌면 아버님께서 남기신 물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날이 밝자 두 사람은 매화봉으로 향했다. 산길은 밤새 내린 비로 질척였고 곳곳에 낙석이 쌓여 있었다. 서연은 약방문의 지도를 보며 방향을 찾았고, 만복은 지팡이로 땅의 빈 곳과 짐승의 기척을 살폈다.
정오가 지나자 사람의 옆얼굴처럼 생긴 봉우리가 나타났다. 그 아래에는 잡초에 뒤덮인 무덤 하나가 있었다. 비석에는 청명산인 백운지묘라는 글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백운 선생의 무덤입니다.”
만복은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역병으로 버려진 자신에게 죽을 떠먹이고 약초를 달여 주었던 노인의 손길이 떠올랐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은혜를 갚지 못했습니다.”
부부는 무덤 주변의 잡초를 뽑고 흘러내린 흙을 정리했다. 서연은 향 대신 마른 약초를 피웠고, 만복은 세 번 절했다.
무덤 앞에는 작은 돌함이 땅에 반쯤 묻혀 있었다. 뚜껑을 열자 낡은 서찰과 옥으로 만든 약병이 나왔다. 서찰 겉에는 윤진사에게 보낸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서연이 조심스럽게 펼쳐 읽었다.
과거 백운은 역병을 치료하다 많은 목숨을 구했으나, 비싼 약을 팔던 허씨 의원 집안의 원한을 샀다. 허씨 집안은 백운이 금지된 독약을 쓴다고 모함했다. 젊은 시절의 윤진사는 백운을 숨겨 주고 결백을 증명할 증인을 찾아 목숨을 구했다.
백운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눈병 비방을 윤진사에게 맡겼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자의 손에 들어갈 것을 염려해 처방의 절반은 만복의 아버지에게 주었던 칼집 속에 숨겼다. 두 집안의 후손이 서로 믿고 힘을 합쳐야 온전한 비방을 얻도록 한 것이었다.
“아버님과 당신의 집안은 우리가 만나기 전부터 인연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부가 된 것도 우연만은 아니었군요.”
옥병 안에는 회백색 가루가 들어 있었다. 서찰에는 이것이 세 번째 약재인 백운석담이라 적혀 있었다. 백운의 무덤 아래 샘에서 자라는 이끼를 달빛에 말려 만든 약이었다.
그러나 눈을 고치려는 자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이 있었다.
“이 약으로 부귀를 독차지하려는 자에게는 독이 되고, 한 사람이라도 가난한 눈병 환자를 먼저 고친 자에게는 약이 되리라.”
서연은 마지막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당신에게 먼저 쓰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더 어려운 눈병 환자를 찾아야 합니다.”
만복은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산 아래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부부가 내려가 보니 열 살쯤 된 소녀가 쓰러진 노파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노파는 역병을 앓고 살아났으나 만복처럼 두 눈이 희게 흐려져 앞을 보지 못했다. 가진 돈이 없어 허준식의 약방에서 쫓겨난 뒤, 좋다는 약초를 찾으러 산에 올랐다가 기력이 다한 것이었다.
“이 할머니를 먼저 치료합시다.”
서연이 말하자 만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는 노파와 소녀를 숯막으로 데려갔다. 청명초와 설화목의 꽃술은 아직 구하지 못했지만, 백운의 서찰에는 약재가 자라는 장소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청명초는 매화봉 동쪽의 오래된 소나무 아래에 있었다. 설화목은 절벽 위에서만 꽃을 피웠다. 만복은 밧줄을 허리에 묶고 절벽 아래에서 서연을 지탱했다. 서연은 손끝이 닿지 않는 꽃술을 얻으려고 바위에 매달렸다.
“조금만 더 왼쪽입니다.”
“발밑 돌이 흔들립니다. 더 나아가면 위험합니다.”
“저 꽃을 놓치면 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순간 바위가 부서지며 서연의 몸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만복은 밧줄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흘렀지만 한 치도 놓지 않았다.
서연은 간신히 바위를 붙잡고 설화목의 꽃술을 따냈다. 만복이 온 힘을 다해 밧줄을 당기자 그녀는 무사히 절벽 위로 올라왔다.
두 사람은 세 가지 약재를 모두 품에 넣었다. 그러나 숯막으로 돌아가는 길목에는 허준식과 그의 장정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했다. 덕분에 내가 산을 헤매지 않고도 약재를 모두 얻게 되었구나.”
허준식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뒤에는 칼과 몽둥이를 든 장정들이 서 있었다.
“약재를 내놓으십시오. 그러면 다치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만복은 서연을 자신의 등 뒤로 물렸다.
“이 약은 가난한 눈병 환자에게 먼저 쓰기로 했습니다.”
“백정 주제에 감히 명의의 비방을 논해? 어차피 네가 눈을 뜬들 다시 짐승이나 잡을 뿐이다. 내 손에 들어가면 고관대작의 눈을 고치고 천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더욱 드릴 수 없습니다.”
허준식의 손짓에 장정들이 달려들었다. 만복은 소리만 듣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첫 번째 사내의 손목을 치고 두 번째 사내의 발을 걸었지만, 뒤에서 날아온 몽둥이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만복은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서연이 남편을 감싸자 허준식은 그녀의 품에서 약재 꾸러미를 빼앗았다.
“이제 비방만 내놓으면 된다.”
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허준식의 뒤편 절벽 아래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약방문이 든 기름종이를 꺼내 높이 들어 보였다.
“한 걸음만 다가오면 이것을 절벽 아래로 던지겠습니다.”
허준식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서연의 손끝에는 백운이 남긴 마지막 비방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5: 아내의 얼굴을 처음 본 날
허준식은 서연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비방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 자신이 빼앗은 약재도 쓸모가 없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돈이냐, 집이냐?”
“빼앗은 약재를 내려놓고 사람들을 물리십시오.”
“그렇게 하면 비방을 내놓겠느냐?”
“우리가 산 아래로 내려갈 때까지 따라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허준식은 마지못해 약재 꾸러미를 바닥에 던졌다. 장정들에게도 뒤로 물러서라고 손짓했다. 서연은 쓰러진 만복을 일으켰다.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다행히 정신은 또렷했다.
“걸을 수 있겠습니까?”
“낭자의 목소리를 따라가겠습니다.”
서연은 약재를 품에 넣고 남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부부가 산길로 접어들자 허준식이 장정들에게 눈짓했다.
그 순간 절벽 위에서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도둑이 남의 처방을 빼앗고도 의원이라 할 수 있느냐!”
숯을 굽던 화전민들과 약초꾼들이 낫과 지게를 들고 나타났다. 허준식이 산을 뒤지는 동안 집을 부수고 약초를 빼앗긴 사람들이었다. 소란을 들은 이들이 부부를 도우러 몰려온 것이었다.
허준식은 수적으로 불리해지자 이를 갈며 물러났다.
“그 약으로 사람을 죽이기라도 하면 네놈들을 관아에 고발할 것이다.”
“사람을 살리기도 전에 약을 빼앗은 죄부터 밝히게 될 것입니다.”
서연의 말에 허준식은 더 대꾸하지 못했다. 그는 장정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갔다.
부부는 숯막으로 돌아와 노파의 치료를 시작했다. 비방에는 약재를 달이는 물의 양과 불의 세기까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청명초는 해가 뜨기 전에 잘게 찧고, 설화목 꽃술은 놋그릇이 아닌 질그릇에 덖어야 했다.
백운석담 가루는 마지막에 세 손가락으로 한 번만 집어 넣어야 했다. 너무 많으면 독이 되고 적으면 아무 효험이 없었다.
서연은 사흘 동안 잠을 줄여 가며 약을 달였다. 만복은 냄새와 끓는 소리를 듣고 불의 세기를 알려 주었다.
“지금은 불이 너무 셉니다. 약 냄새 끝에 탄내가 섞였습니다.”
“장작 두 개를 빼겠습니다.”
“이제 좋습니다. 물이 절반 아래로 줄면 맑은 천에 거르십시오.”
완성된 약은 한쪽은 마시고, 남은 것은 깨끗한 천에 적셔 눈 위에 올려야 했다. 노파는 두려움에 손을 떨었다.
“이 늙은이가 잘못되어도 너희를 원망하지 않겠다. 약값도 없고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손녀가 할머니의 손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서연은 노파의 손을 잡았다. 만복도 곁에 앉아 자신의 일을 들려주었다.
“저 역시 역병으로 눈을 잃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지만 다시 빛을 볼 희망이 있다면 함께 믿어 보십시다.”
노파는 약을 마시고 눈 위에 젖은 천을 올렸다. 처음 이틀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사흘째에는 눈이 몹시 따갑다며 몸부림쳤고, 넷째 날에는 오히려 흰 막이 짙어진 것처럼 보였다.
허준식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백정 부부가 사람을 상대로 독약을 시험한다고 수군거렸다. 노파의 손녀도 겁을 먹었지만 서연은 비방에 적힌 날짜를 채워야 한다며 치료를 계속했다.
이레째 아침, 노파가 눈 위의 천을 걷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할머니, 제가 보이세요?”
소녀가 울먹이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노파의 흐린 눈동자에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비쳤다.
“네 얼굴에 주근깨가 이렇게 많았더냐?”
노파가 떨리는 손으로 손녀의 뺨을 만졌다. 소녀는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터뜨리며 할머니를 끌어안았다.
노파는 완전히 먼 곳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사람의 얼굴과 길을 구별할 만큼 시력을 되찾았다. 비방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만복은 기뻐하면서도 약 앞에서 오래 망설였다.
“두렵습니까?”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뜬 뒤에 제가 변할까 두렵습니다.”
“어떻게 변한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제가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때 저를 업신여겼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세상을 보게 된 뒤 옷과 얼굴로 사람을 판단하면 어찌하겠습니까?”
“당신은 보이지 않을 때도 사람의 마음을 살폈습니다. 눈을 뜬다고 그 마음까지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연은 남편을 위해 다시 약을 달였다. 노파에게 쓴 것과 똑같은 양이었지만 손이 더욱 떨렸다. 만복은 약을 마신 뒤 눈 위에 천을 얹었다.
첫날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흘째부터 눈 안쪽이 불에 덴 것처럼 아팠다. 만복은 밤새 신음하면서도 치료를 멈추지 않았다.
이레째가 되자 흰 막 가장자리에 작은 틈이 생겼다. 그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등잔불이 어느 쪽에 있는지 손으로 가리켰다.
“밝은 것이 느껴집니다.”
열흘째 아침, 서연은 마지막으로 약에 적신 천을 걷었다.
“천천히 눈을 떠 보십시오.”
만복은 떨리는 눈꺼풀을 조금씩 들어 올렸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하얀 안개처럼 보였다. 이윽고 빛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생겨났고, 그림자는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푸른 치마와 옅은 회색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쪽진머리에는 값싼 나무비녀 하나만 꽂혀 있었다. 손은 거칠고 눈 밑에는 잠을 이루지 못한 흔적이 짙었다.
그러나 만복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당신입니까?”
“제가 보이십니까?”
만복은 눈을 깜빡이며 서연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눈물이 차오를 때마다 모습이 다시 흐려졌지만 그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얼굴과 다릅니다.”
서연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생각보다 못생겼습니까?”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게 생겼습니다.”
만복은 떨리는 손으로 아내의 얼굴을 감쌌다. 손끝으로만 알던 이마와 눈썹, 뺨을 이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얼굴을 보려고 제가 그 긴 어둠 속을 걸어왔나 봅니다.”
서연도 남편의 손을 잡고 울었다.
며칠이 지나자 만복은 가까운 사물뿐 아니라 멀리 있는 산봉우리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아침마다 해가 뜨는 광경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감탄했다. 푸른 나뭇잎과 붉은 감, 냇물에 비친 하늘을 오래 바라보았다.
비방의 효험이 알려지자 눈병 환자들이 각지에서 찾아왔다. 부부는 가난한 이에게는 약값을 받지 않았고, 넉넉한 집에는 형편에 맞게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휘장을 두른 가마 한 채가 초가 앞에 멈췄다. 가마에서 내린 사람은 고을 수령의 아들이었다. 그는 눈병으로 한 달 안에 시력을 잃을 처지였다.
그 뒤에서는 허준식이 창백한 얼굴로 따라 내렸다. 자신이 치료하지 못한 환자가 백정 부부를 찾아온 것이었다.
“수령께서 아들의 눈을 고치면 원하는 대가를 모두 주겠다고 하셨다.”
만복은 서연을 바라본 뒤 조용히 대답했다.
“먼저 밝혀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백운 선생을 모함한 집안의 후손이 어찌하여 지금껏 그 비방을 훔치려 했는지, 관아에서 사실부터 가려 주십시오.”
허준식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백운을 둘러싼 오래된 죄와 약방문을 빼앗으려 한 그의 악행이 마침내 세상에 드러날 때가 온 것이었다.
※ 6: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큰 복
수령은 아들의 눈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 급했지만 만복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허준식이 남의 약방문을 빼앗으려고 초가를 부수고 장정들을 동원했다는 증인이 많았다. 화전민과 약초꾼들은 관아에 나와 자신들이 본 일을 낱낱이 증언했다.
허준식의 약방을 조사하자 다른 의원에게서 훔친 처방과 가난한 환자에게 터무니없는 빚을 씌운 장부가 나왔다. 백운을 모함했던 옛 기록도 그의 집안 문서에서 발견되었다.
결국 허준식은 의원 자격을 빼앗기고 백성에게 갈취한 재물을 돌려주라는 벌을 받았다. 최참봉이 윤씨 집안의 빚문서를 고친 사실까지 함께 드러나면서 그는 빼앗은 땅과 집을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게 되었다.
“이제 수령의 아들을 치료해도 되겠습니까?”
서연이 묻자 만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죄를 밝히는 것과 병자를 살리는 일은 다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권세나 의원의 죄와 상관없는 환자일 뿐입니다.”
수령의 아들은 밤마다 눈에 불덩이가 굴러다니는 듯한 통증을 겪고 있었다. 만복은 눈동자의 빛과 붉어진 자리를 살폈고, 서연은 비방에 따라 약재의 양을 조절했다.
병의 원인이 역병은 아니었으므로 백운석담을 절반만 사용하고 열을 내리는 약초를 더했다. 열흘 뒤 붉은 기운이 가라앉았고 흐려지던 시력도 되살아났다.
수령은 기뻐하며 은자 백 냥과 넓은 집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만복은 모두 받지 않았다.
“치료에 든 약재 값과 앞으로 가난한 환자들에게 쓸 비용만 받겠습니다.”
“눈을 고쳐 준 은혜에 비하면 너무 적지 않으냐?”
“아들의 눈을 걱정하셨던 마음을 기억하신다면, 눈병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백성을 위한 약재밭을 마련해 주십시오.”
수령은 매화봉 아래의 묵은 밭을 약초밭으로 내주었다. 백운의 무덤과 설화목이 자라는 절벽도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도록 금표를 세웠다.
부부는 그곳에서 청명초와 여러 약초를 길렀다. 노파의 손녀를 비롯해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에게 약초를 구별하는 법과 글을 가르쳤다. 치료비는 부자에게 넉넉히 받고 가난한 이에게는 쌀 한 줌만 받거나 아예 받지 않았다.
만복은 눈을 뜬 뒤에도 백정의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손끝으로 가죽을 익힌 경험에 눈까지 더해지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물건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신발은 가볍고 질겼으며, 눈길과 진흙길에서도 쉽게 미끄러지지 않았다. 서연이 안쪽에 부드러운 천을 대고 매화 문양을 수놓자 양반과 장사꾼들이 앞다투어 주문했다.
“이제 눈도 떴고 의원으로 이름도 얻었는데 직접 가죽을 만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 상인이 묻자 만복은 웃으며 대답했다.
“제 손을 먹여 살린 일이 어찌 부끄럽겠습니까?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입니다.”
부부는 신발과 가죽 주머니를 팔아 얻은 돈으로 약재를 샀다. 먼 길을 걸어야 하는 보부상에게는 신발을 싸게 내주었고, 다리를 다친 노인에게는 발 모양에 맞춰 특별한 신발을 만들어 주었다.
만복이 만든 가죽 제품은 한양까지 알려졌다. 왕실에 물품을 대는 상단에서 말안장과 신발을 대량으로 주문했고, 부부의 살림은 날로 넉넉해졌다.
몇 해가 지나자 두 사람은 큰 기와집과 여러 채의 창고를 마련했다. 논밭도 수십 마지기로 늘어났다. 하지만 처음 살던 산기슭 초가는 허물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이 낡은 집을 남겨 두어 무엇에 쓰시려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잊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초가는 먼 곳에서 온 가난한 환자들의 숙소가 되었다. 아궁이에는 늘 불이 피워졌고, 뒤뜰의 솥에서는 죽이 끓었다.
세월이 흘러 서연과 만복 사이에는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백정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글과 약초를 배우고 아버지에게 가죽 다루는 법과 사람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법을 배웠다.
어느 봄날, 최참봉이 남루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재물을 잃고 병까지 얻어 한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뒤 아무도 그를 받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에 내가 자네들을 괴롭혔으니 치료해 주지 않아도 할 말이 없네.”
서연은 오래전 자신을 후실로 삼으려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만복은 아내의 침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당신의 잘못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최참봉은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병든 사람을 문밖에서 돌려보낸다면 우리도 예전에 당신과 다를 바 없겠지요. 들어오십시오.”
부부는 최참봉의 눈을 치료했다. 완전히 예전처럼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지팡이 없이 걸을 만큼은 볼 수 있게 되었다. 최참봉은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멀쩡한 눈을 가지고도 사람을 보지 못했네. 눈이 먼 사람은 자네가 아니라 나였어.”
만복은 그를 일으켰다.
“앞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날 저녁, 부부는 백운의 무덤을 찾았다. 매화봉에는 흰 꽃이 구름처럼 피어 있었고, 노을이 산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만복은 무덤 앞에 술을 올리고 깊이 절했다.
“선생께서 살려 주신 눈으로 아내의 얼굴을 보았고, 병든 사람을 살피며 살아갑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겠습니까?”
서연은 오래된 약방문을 새 비단에 싸서 돌함 안에 다시 넣었다.
“이 비방은 우리만의 것이 아닙니다. 훗날 마음이 바른 사람이 찾아오면 다시 세상으로 나가겠지요.”
바람이 불자 매화 꽃잎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만복은 처음 눈을 뜬 날처럼 서연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세월이 흘러 눈가에는 잔주름이 생겼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가장 따뜻한 얼굴이었다.
“무엇을 그렇게 보십니까?”
“어둠 속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제 매일 보는 얼굴이 지겹지도 않습니까?”
“눈을 잃고 나서야 빛의 귀함을 알았고, 당신을 만나고 나서야 사람의 귀함을 알았습니다. 어찌 지겨울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산길을 내려왔다. 올라갈 때에는 서연이 만복의 눈이 되어 주었고, 험한 길에서는 만복이 서연의 발이 되어 주었다. 눈을 되찾은 뒤에도 두 사람이 걷는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몰락한 양반가의 여식이 눈먼 백정을 서방으로 맞았을 때 그녀가 복을 걷어찼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는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서연이 얻은 것은 높은 벼슬이나 화려한 가문보다 귀한 사람의 마음이었고, 만복이 되찾은 것은 눈앞의 빛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믿으며 가난을 이겨 냈고, 숨겨진 비방으로 많은 이를 살렸으며, 정직한 손으로 큰 부를 이루었다.
그 집안은 대대로 눈병을 치료하는 의술과 튼튼한 가죽을 만드는 기술을 이어 갔다. 신분을 따지지 않고 환자를 받으며, 벌어들인 재물 가운데 일부를 가난한 이에게 내놓는 것도 가문의 법도로 삼았다.
사람들은 그 집 대문에 적힌 짧은 글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눈이 밝다고 모두 사람을 보는 것은 아니며, 마음이 밝아야 비로소 사람을 볼 수 있다.
유튜브 엔딩멘트
세상이 손가락질한 혼인이었지만 서연과 만복은 서로의 눈과 발이 되어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귀천은 신분이 아니라 마음과 행실로 정해지는 것이겠지요. 오늘 이야기가 따뜻한 여운을 남겼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다음 양반야담에서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