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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어머니가 지어준 보약의 달콤한 비밀 『계서야담』

양반야담 2026. 9. 17. 08:19

시어머니가 지어준 보약의 달콤한 비밀 『계서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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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명문거족 양반가에 시집왔으나 병약한 지아비 탓에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한 며느리. 어느 날 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기이한 탕약을 먹이고 칠흑 같은 방에 낯선 사내를 들입니다. 가문을 위해 대리부를 들이는 끔찍한 악습 속에서 수치심에 떨던 며느리는, 밤마다 찾아오는 사내의 애틋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점차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데요. 가문의 위선과 억압 속에서 피어난 금지된 사랑, 두 사람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양반가 담장 너머 은밀한 밤의 기록, 지금 시작합니다.

※ 1: 병약한 지아비와 대가 끊길 위기

뼛속까지 시리게 하는 한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이 거대한 기와집의 높은 담장을 쉴 새 없이 때리고 있었습니다. 한양 도성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뼈대 깊은 명문거족이자, 그 재물이 산을 이룬다는 박 대감댁의 안채는 겉보기에는 더없이 화려하고 장엄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솟을대문과 첩첩이 이어진 기와지붕들은 이 가문이 지닌 막강한 권세와 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 거대한 대문 안, 안채를 감도는 공기는 한겨울의 서릿발보다 차갑고, 오래된 무덤처럼 숨이 막힐 듯 무거웠습니다. 이 화려하고도 거대한 새장에 갇힌 가여운 새 한 마리, 그녀가 바로 박 대감댁의 하나뿐인 며느리 소희였습니다. 소희는 비록 가세는 기울었으나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 가문에서 금지옥엽으로 곱게 자라, 불과 열일곱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이 화려한 대문 안으로 붉은 가마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혼례를 치르던 날, 온 고을 사람들의 축복과 부러움 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조선 최고의 명문가 안주인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지만, 그녀의 끔찍한 불행은 족두리를 쓴 그 첫날밤부터 이미 잔인하게 잉태되어 있었습니다.

신방에 들어온 지아비는 허우대만 멀쩡할 뿐, 밤새도록 피 섞인 기침을 쏟아내며 소희의 옷고름조차 풀지 못하는 중증의 병자였던 것입니다. 세월이 무심하고도 가혹하게 흘러 소희가 시집온 지도 어느덧 삼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지아비의 병세는 차도는커녕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이제는 제 힘으로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랑채에서 밤낮으로 풍겨 나오는 독하고 쓴 탕약 냄새는 소희의 붉던 뺨을 창백하게 만들며 그녀의 찬란한 청춘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고, 초점 잃은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는 핏기 없는 지아비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소희의 가슴은 차갑게 얼어붙어 갔습니다. 그러나 소희를 가장 숨 막히게 옥죄고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결코 고된 지아비의 병수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거대한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시어머니 윤 씨 부인의 절대적이고도 폭력적인 억압이었습니다.

"삼 년이다. 네가 우리 집안의 귀신이 되겠다고 사주단자를 받고 들어온 지 꼬박 삼 년이 지났단 말이다. 헌데 어찌하여 아직도 네 배에는 작은 태기조차 없는 것이냐. 칠거지악 중에서도 자식을 낳지 못하는 무자(無子)의 죄가 으뜸인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이냐! 네년이 우리 가문의 씨를 말려 조상님들 뵐 면목을 없게 만들 작정이냐!"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릴 때마다, 시어머니인 윤 씨 부인의 서슬 퍼런 꾸지람과 저주 섞인 호통이 소희의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독기가 서린 시어머니의 시선은 늘 소희의 납작한 아랫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삼 년 동안 단 한 번도 온전한 합방을 치르지 못한 지아비의 속사정을 이 집안에서 누구보다 잘 아는 시어머니였지만, 가문의 핏줄을 잇지 못한 모든 책임과 원망은 오롯이 힘없고 가여운 며느리인 소희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양반가의 꼿꼿한 체통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시어머니에게 하나뿐인 아들의 치명적인 결함은 입 밖으로 꺼내서도, 감히 상상해서도 안 되는 무서운 금기였고, 오직 며느리가 석녀(石女)이기 때문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철저히 위장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아아, 천지신명이시여. 어찌하여 제게 이토록 가혹하고 끔찍한 형벌을 내리시나이까. 지아비의 따뜻한 온기 한번 느끼지 못한 채 서서히 사그라지는 이 서글픈 청춘도 서럽거늘, 어찌하여 제가 이 집안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이 숨 막히는 지옥 구덩이에서 말라 죽어가야 한단 말입니까. 차라리 제 목숨을 거두어 가시옵소서.'

소희는 매일 밤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에서 홀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소리 죽여 피눈물을 삼켰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하인들의 동정 어린, 혹은 비웃음 섞인 곁눈질조차 이제는 소희의 연약한 살갗을 날카로운 칼로 베어내는 듯 고통스러웠습니다. 가문의 대가 끊어지면 양반의 고고한 체면은 진흙탕에 떨어지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다른 문중 사람들에게 그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고스란히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지독한 불안감과 탐욕에 사로잡힌 시어머니 윤 씨 부인의 눈빛은 날이 갈수록 이성을 잃고 광기에 가깝게 번뜩이기 시작했습니다. 용하다는 무당을 밤마다 안채로 불러들여 피비린내 나는 굿판을 벌이고, 수백 냥의 거금을 들여 기괴한 부적을 써서 소희의 속적삼과 베갯잇에 몰래 꿰매어 넣었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시어머니는 밤낮으로 음침한 눈빛을 한 늙은 매파를 안방으로 은밀히 불러들여 주위를 물린 채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의 은밀한 귓속말이 길어질 때마다 소희의 등줄기에는 알 수 없는 서늘하고도 끔찍한 불길함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가문의 핏줄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사람의 목숨조차 파리 목숨처럼 여길 잔혹한 시어머니가, 과연 무슨 끔찍한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 소희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거대하고 음습한 어둠의 그림자는 이미 소희의 발목을 서서히, 그리고 아주 단단히 휘감아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 2: 시어머니가 건넨 수상한 탕약

초겨울의 차가운 어스름이 무겁게 내려앉고, 마당에 소복이 쌓인 하얀 눈 위로 잿빛 그림자가 길고 스산하게 드리워지던 날이었습니다. 평소라면 부엌의 저녁 수라를 꼼꼼히 살피고 안채의 문단속을 철저히 해야 할 바쁜 시간이었지만, 시어머니 윤 씨 부인은 소희를 인적이 드문 후원의 낡고 외진 별당으로 은밀히 불렀습니다. 그 별당은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문을 열자마자 짙은 곰팡내와 퀴퀴한 먼지 냄새가 진동했고, 두꺼운 창호지 위로 바깥의 빛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대낮에도 칠흑같이 어두운, 마치 무덤 같은 곳이었습니다. 방 한가운데 위태롭게 놓인 작은 촛불 하나만이 시어머니의 일그러지고 탐욕스러운 얼굴에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의 주름진 손에는 뚜껑이 덮인 낡은 사기그릇이 굳게 들려 있었고, 그 안에서는 코를 찌르는 톡 쏘는 듯한 기이하고 독한 약초 냄새가 연기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마셔라.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서 캔 백 년 묵은 산삼과 가장 귀한 녹용, 그리고 천기를 품은 온갖 진귀한 약재들을 아홉 번 찌고 말려 달여 낸 비방이니라. 죽어가는 고목에도 붉은 꽃을 피우고, 백발백중 튼튼한 사내아이를 점지해 준다는 영약 중의 영약이다. 단 한 방울도 바닥에 남기지 말고 당장 비워내야 할 것이다."

시어머니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갑게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등골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뱀처럼 차분하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기에, 소희는 평소보다 더욱 극심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어, 어머님. 갑자기 이런 귀한 탕약을 어찌 제게... 그리고 어찌하여 이토록 어둡고 으슥한 후원 별당으로 소녀를 부르셨나이까. 소녀, 까닭 모를 두려움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오옵니다."

"잔말 말고 단숨에 들이켜라! 이 어미가 벼랑 끝에 선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천금을 주고 어렵게 구해온 약이다. 네년의 그 척박하고 쓸모없는 배 속에 생명의 붉은 씨앗을 잉태하게 해 줄 유일하고도 마지막 동아줄이란 말이다! 어서 입을 벌리지 못할까!"

시어머니의 갑작스러운 호통에 소희는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부들부들 떨리는 양손으로 사기그릇을 조심스레 받아 들었습니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피비린내 같은 냄새에 헛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시어머니의 서슬 퍼런 눈초리와 억압을 거역할 방도는 이 집안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소희는 눈을 질끈 감고 검고 걸쭉한 탕약을 단숨에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넘겼습니다. 약을 삼키기가 무섭게 위장에서부터 불덩이를 삼킨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맹렬하게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마에 맺힌 굵은 식은땀이 볼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렸고, 머릿속은 지독한 독주를 연거푸 들이킨 것처럼 아득하고 몽롱해져 왔습니다. 약 기운에 취한 소희가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지려 하자, 시어머니는 마치 덫에 걸린 짐승을 다루듯 기다렸다는 듯이 소희의 두꺼운 겉옷과 치마를 거칠게 벗겨내고, 뼛속까지 비치는 얇고 부드러운 하얀 명주 속적삼 하나만을 남겨두었습니다.

"어, 어머님... 몸이, 몸이 이상하옵니다.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이 나는 것만 같사옵니다. 제발 저를 방으로 보내주시옵소서..."

"당연한 일이다. 네 몸의 뼛속 깊이 박힌 차가운 음기를 단숨에 몰아내고, 사내의 뜨거운 양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완벽하게 하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내 말을 토 씨 하나 틀리지 말고 뼛속 깊이 명심해서 들어라. 오늘 밤, 이 방에는 하늘의 달빛 한 점도 새어 들어와서는 아니 된다. 내일 아침 날이 밝을 때까지 넌 혀를 깨무는 한이 있더라도 입 밖으로 단 한마디의 신음조차 내뱉어서는 아니 되며, 방문을 열고 누가 들어오든 절대 눈을 뜨거나 그 자의 얼굴을 확인하려 들어서도 아니 될 것이다. 그저 넌 이 위대한 가문을 위한 제물이 되었다 생각하고, 네 몸을 온전히 내어주거라."

시어머니의 그 잔인한 말은 소희의 뇌리를 커다란 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끔찍하고도 충격적인 선고였습니다. 몸을 내어주라니, 눈을 뜨지 말라니.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뼈대 있는 양반가의 여식으로 자라온 소희가 모를 리 없었습니다. 가문의 대가 끊길 위기에 처했을 때, 양반가에서 몰래 씨를 빌려오기 위해 야심한 밤에 신분 모를 낯선 사내를 들이는 극비리의 끔찍한 악습. 소문으로만 떠돌며 손가락질받던 이른바 '씨내리'를 며느리의 방에 들이겠다는 무서운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어, 어머님! 안 됩니다! 어찌 이런 짐승만도 못한 끔찍한 짓을 제게 강요하시나이까! 차라리 은장도로 제 목을 찔러 죽여주시옵소서! 명문거족 양반가의 며느리로서 지아비가 아닌 다른 낯선 사내를 품으라니요, 그리하여 얻은 그 더러운 핏줄이 어찌 가문의 핏줄이라 당당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절대 그리할 수 없사옵니다!"

소희는 시어머니의 비단옷 자락을 부여잡고 짐승처럼 피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엎드려 애원했습니다. 가문의 헛된 위선을 지키기 위해 며느리를 천박한 대리모로 전락시키려는 시어머니의 잔인함에 소희의 이성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냉혹하게 소희의 손을 구둣발로 쳐내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소희의 귓가에 끔찍한 협박을 속삭였습니다.

"네년이 진정 우리 가문을 몰락시킬 작정이냐! 이 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오직 나와 하늘만이 아는 절대적인 비밀이다. 네가 이 방을 살아서 두 발로 나가고 싶다면, 이 가문의 어엿한 안주인으로 남아 호사를 누리고 싶다면 오늘 밤 입을 꽉 다물고 그저 주는 씨를 받아내야 할 것이다. 만약 내 뜻에 반항하여 소란을 피운다면 내일 아침 날이 밝기 무섭게, 네 친정 아비의 목숨이 먼저 끊어질 줄 알아라. 내가 네 친정 가문을 역모로 엮어 멸문지화를 내리는 것은 일도 아니니라."

친정 부모의 목숨을 담보로 한 그 소름 끼치는 말과 함께, 시어머니는 방 안의 유일한 빛이었던 촛불을 훅 불어 잔인하게 꺼버렸습니다. 완벽하게 차단된 칠흑 같은 어둠. 덜컹거리는 무서운 소리와 함께 밖에서 굵은 문고리가 굳게 채워졌고, 소희는 빛 한 점 없는 차가운 방바닥에 홀로 버려졌습니다. 혈관을 태우는 약 기운에 취해 몽롱해진 정신 속에서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끔찍한 수치심과 극도의 공포가 그녀의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떨게 만들었습니다. 짐승의 교미를 강요당하는 씨받이 암소로 전락해버린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비참하고 역겨워 목을 놓아 통곡하고 싶었지만, 친정집을 멸문시키겠다는 시어머니의 살기 어린 협박에 그저 피가 나도록 입술만 꽉 깨물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체감상으로는 수십 년과도 같은 끔찍하고 길고 긴 피 말리는 정적이 흐른 뒤, 후원의 마른 낙엽을 밟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바스락, 바스락.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마침내 별당의 방문 앞에서 딱 멈춰 섰습니다. 끼이익- 하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밤공기와 뒤섞인 낯선 사내의 무겁고 거친 숨소리가 어둠 속으로 스멀스멀 스며 들어왔습니다. 소희는 숨을 헉 들이마시며 얇은 이불을 생명줄처럼 꽉 움켜쥐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지옥의 밤이, 그녀의 숨통을 조이며 무자비하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 3: 낯선 사내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

철컥, 하고 무거운 문이 닫히며 밖에서 다시 빗장이 단단히 채워지는 소리가 어둠 속을 무겁게 울렸습니다. 이제 이 좁고 숨 막히는 캄캄한 방 안에는 짐승 같은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소희와, 가문의 씨내리로 짐승처럼 팔려 온 정체불명의 낯선 사내 단둘뿐이었습니다. 소희는 방구석으로 몸을 한껏 둥글게 움츠린 채, 무릎에 얼굴을 깊이 파묻고 소리 없이 처절하게 흐느꼈습니다. 극도의 공포심과 굴욕감에 온몸의 핏기가 가시고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지만, 시어머니가 억지로 먹인 탕약의 기운 탓에 몸은 반대로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심장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나를 죽이고 취해라. 내 혀를 깨물어서라도, 벽에 머리를 박아서라도 이 치욕스럽고 구역질 나는 짓을 거부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 사내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통 이런 은밀하고 천박한 일에 거금을 받고 동원되는 사내들은, 뒷골목에서 돈에 팔려 온 거친 상놈이거나 무지렁이 건달이기 마련이었습니다. 소희는 낯선 사내가 짐승처럼 거친 손길로 자신의 이불을 무자비하게 걷어내고 탐욕스럽게 달려들 것이라 짐작하며, 두 눈을 질끈 감고 방어하듯 이를 꽉 악물었습니다. 사내의 체온이 지척으로 가까워질수록 소희의 얇은 어깨는 미친 듯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떨렸습니다.

하지만, 소희의 끔찍했던 예상과 달리 사내의 움직임은 너무도 조용하고, 오히려 조심스럽게 머뭇거리는 듯했습니다. 이불깃을 찢어질 듯 꽉 움켜쥔 소희의 하얗게 질린 손 위로, 사내의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깃털이 내려앉듯 살며시 포개어졌습니다. 그 순간 소희는 불에 덴 듯 흠칫 놀라며 숨을 완전히 멈췄습니다. 억세고 폭력적일 줄만 알았던 사내의 손은 뜻밖에도 너무나 따뜻하고 건실했으며, 외간 여인의 살결을 만지는 것을 극도로 조심스러워하는 듯 미세하게,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내는 완력으로 이불을 강제로 빼앗거나 옷고름을 뜯어내는 대신, 소희의 차가운 손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한참을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온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고 들려온 사내의 첫마디는, 소희의 차갑게 굳어버린 심장을 묘하고도 강렬하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떨지 마십시오... 해치지 않겠습니다."

겨울밤의 바람 소리처럼 낮고 깊은, 그러나 아직 앳된 청년의 기운이 묻어나는 무척이나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내의 목소리였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천박한 욕정이나 폭력성은 단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았고, 오히려 이 기구하고 잔인한 운명에 처한 여인을 향한 깊은 연민과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자신을 겁탈하러 온 사내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위로에, 소희가 꽉 다문 입술 새로 억눌린 울음을 흑흑 터뜨리자, 사내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다가와 소희의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자신의 넓은 무명 소매 깃으로 아주 정성껏 닦아주었습니다.

"부인께서 지금 얼마나 끔찍한 수치심과 살을 에는 두려움에 떨고 계실지, 감히 저 같은 놈이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 몹쓸 짓을 강요받고 방안에 갇히신 부인의 고통을 생각하면, 저 역시 가슴이 수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 비통합니다. 허나... 이 끔찍한 밤이 무사히 지나지 않으면 밖에서 지키고 선 자들에 의해 부인께서 더 큰 화를 입으실 것을 명백히 알기에, 이리 짐승처럼 다가가는 저의 씻을 수 없는 무례를 부디,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사내의 간절한 속삭임은 깍듯한 예의를 갖추고 있었고, 그의 말투에는 저잣거리의 천박함이 아닌 오랜 시간 글을 읽은 자의 깊은 기품이 배어 있었습니다. 짐승의 교미를 위한 단순한 씨받이 도구로 내던져졌다고 생각했던 소희에게, 자신을 하나의 귀한 인격체이자 가여운 여인으로 온전히 존중하고 다독여주는 이 낯선 사내의 다정함은, 세상을 뒤흔드는 엄청난 충격이자 생전 처음 겪어보는 낯선 위로로 다가왔습니다. 사내는 급하게 여인의 옷고름을 풀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소희의 얼음장 같이 차갑게 식은 어깨를 자신의 넓고 따뜻한 품으로 아주 부드럽고 단단하게 감싸 안아주었습니다. 사내의 품에서는 산속의 시원한 솔향기와 함께, 벼루에 먹을 갈 때 나는 맑고 깊은 은은한 묵향(墨香)이 기분 좋게 풍겨왔습니다.

시어머니가 먹인 탕약의 뜨거운 기운이 몸의 혈관을 지배하고, 사내의 단단하고 따뜻한 가슴에 폭 안긴 채 그의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심장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소희의 몸을 굳게 조이고 있던 극도의 긴장감과 공포가 기적처럼 스르르 눈 녹듯 풀려가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껏, 심지어 혼례를 치른 지아비에게조차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내의 진심 어린 애정과 가슴 떨리는 온기였습니다. 사내의 손길은 소희의 젖은 뺨에서 가느다란 목덜미로, 그리고 하얀 속적삼의 옷고름으로 아주 조심스럽고 애틋하게 이어졌습니다. 그 손길 하나하나에는 마치 조금만 힘을 주어도 바스러질 것 같은 깨지기 쉬운 귀한 옥구슬을 다루는 듯한, 지극한 조심성과 숭고함마저 담겨 있었습니다.

소희는 두 눈을 감은 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내의 단단한 목과 어깨를 조심스레, 그러나 간절하게 끌어안았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명문가 양반가 며느리로서 지켜야 할 알량한 체면과 정절의 윤리가 끊임없이 날카로운 경고를 울리고 있었지만, 몸은 이미 사내가 전해주는 그 달콤하고도 강렬한 온기를 밀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지독한 수치심과 공포로 시작된 칠흑 같은 밤은, 어느새 서로의 깊은 상처를 보듬고 체온을 나누는 기이하고도 뜨거운 밀회의 시간으로 걷잡을 수 없이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여전히 살을 에는 칼바람이 창호지를 흔들어대고 있었지만, 차가운 별당 안에는 난생처음으로 껍데기가 아닌 온전한 여인으로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소희의 뜨거운 숨결과, 그녀를 지키려는 사내의 부드러운 온기만이 빈틈없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 4: 싹트는 연정

그 충격적이고도 숨 막혔던, 그러나 묘하게도 가슴이 시리도록 따뜻했던 첫날 밤 이후, 후원 별당에서의 비밀스러운 밀회는 며칠 밤 동안이나 거짓말처럼 계속 이어졌습니다. 시어머니 윤 씨 부인은 며느리 소희에게서 확실한 태기가 보일 때까지 이 끔찍한 짓을 절대 멈추지 않겠다 독하게 작정한 듯, 매일 저녁 어스름이 짙게 깔리면 어김없이 독하고 역겨운 탕약을 달여 소희에게 강제로 먹이고는 차가운 별당에 매몰차게 가둬버렸습니다. 처음 며칠은 도살장에 질질 끌려가는 가여운 소처럼 극심한 두려움과 모멸감에 사시나무 떨듯 떨며 별당으로 향했던 소희였지만, 밤이 거듭되고 사내와의 만남이 이어질수록 그녀의 깊은 내면에는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는 위험하고도 아찔한 감정의 싹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아침이 밝아오고 안채로 돌아오면, 양반가의 며느리로서 두 지아비를 섬겼다는 극심한 죄책감과 씻을 수 없는 자기혐오에 시달리며 남몰래 피눈물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사방에 밤의 어둠이 짙게 찾아오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리며 문밖에서 들려올 그 낯선 사내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애타게, 아주 간절히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소희는 그 짙은 어둠 속에서 사내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서로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일이 끝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려는 시어머니의 독한 엄명 탓에, 사내는 방에 들어설 때면 언제나 검은 복면으로 얼굴의 반을 단단히 가리고 있었고, 불을 밝히는 것은 끔찍한 죽음의 형벌을 불러올 절대적인 금기였습니다. 하지만 시각이 완벽하게 차단된 만큼 소희의 다른 모든 감각들은 어둠 속에서 더욱 예민하게 곤두서 사내의 모든 것을 깊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사내의 넓고 단단한 품에서 늘 한결같이 풍기는 맑은 묵향과 오래된 서책의 냄새. 거친 노동이나 농사일로 다져진 투박함이 아니라, 단정하고 올곧게 뻗은 기품 있는 어깨선. 그리고 무엇보다 소희의 얼어붙은 마음을 거세게 흔든 것은 그녀의 살결을 어루만지는 사내의 섬세한 손끝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가녀린 손을 꼭 어루만지는 사내의 손바닥에는 분명 단단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지만, 그것은 낫이나 괭이를 평생 잡아 뭉툭해진 농부의 거친 굳은살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 붓을 꽉 쥐고 사서삼경을 써 내려가며 집게손가락과 중지 마디에만 유독 깊게 패어 박인, 학문을 깊이 수양하는 선비 특유의 굳은살이 분명했습니다.

'이분은 절대 푼돈에 몸을 파는 천한 상놈이나, 저잣거리를 떠도는 난봉꾼 건달이 아니야. 내 머리칼을 넘겨주는 그 손끝의 지극한 섬세함과, 내뱉는 숨결마다 담긴 올곧은 기품은 분명 뼈대 있는 양반가의 훌륭한 도령이 틀림없어. 필시 가세가 억울하게 기울어 늙은 노모나 굶주리는 식솔들을 힘겹게 먹여 살리기 위해, 양반으로서 뼈를 깎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이 끔찍한 대리부 노릇에 제 몸을 던진 것이야. 오죽 절박했으면 이 사지(死地)로 걸어 들어왔을까.'

소희의 그 슬픈 짐작은 별당의 밤이 깊어갈수록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변해갔습니다. 두 사람은 문밖의 감시자들 때문에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눌 수 없었기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한 뜨거운 숨결로 아주 짧고 애틋한 밀어를 주고받곤 했습니다.

"부인, 밖의 바람이 살을 에는 듯 참으로 차갑습니다. 제가 떠나고 나면 이 밤이 다 지나도록 차디찬 별당에서 홀로 공포를 견디셔야 할 부인의 지독한 외로움이 몹시도 제 가슴에 사무쳐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나으리의 품이 이리도 따뜻하고 포근한데... 어찌하여 이 별당의 밤은 야속하게도 이리 짧기만 한 것인지요. 나으리를 보내야 하는, 날이 밝아오는 새벽이 저는 너무도 두렵사옵니다."

어느 눈 내리는 밤, 폭풍 같던 정사가 끝난 후 소희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성스레 쓰다듬던 사내는, 그녀의 귓가에 낮고 애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옛 시조 한 구절을 가만히 읊조렸습니다.

"달빛은 차갑게 빈방을 비추는데, 짝 잃은 기러기의 시름은 뉘에게 전할꼬... 부인, 비록 제가 얼굴 없는 그림자처럼 찾아와 부인의 귀한 몸을 탐하는 대역 죄인이오나, 제 마음만은 부인을 향한 걷잡을 수 없는 연모로 붉게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짐승처럼 씨만 남기고 떠나야 하는 제게, 부인을 안을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매일 밤 피눈물이 날 뿐입니다."

그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시조를 듣는 순간, 소희는 사내 역시 자신과 완벽하게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단순한 씨받이의 도구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여인으로서 자신을 가슴 깊이, 그리고 처절하게 사랑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시어머니의 끔찍한 음모와 폭력으로 시작된 짐승 같은 교합이, 어느새 세상 그 무엇보다 애틋하고 간절한 목숨을 건 사랑으로 붉게 변해버린 것입니다. 소희는 껍데기만 남은 지아비의 그림자 아래서 그저 시들어 죽어가야만 하는 양반가 며느리의 억압된 삶에 지독한 회의감과 환멸을 느꼈습니다. 가문의 헛된 체면을 위해 자신을 물건처럼 도구로 전락시킨 이 위선적이고 역겨운 거대한 대문 안에서, 더 이상 텅 빈 허수아비 안주인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이 끔찍한 가문의 노리개가 되어 얼굴도 모르는 이분의 아이를 낳고, 평생을 다른 사내의 핏줄이라 속이며 가짜 어미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내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이분의 따뜻한 손을 잡고 세상 끝으로 도망치고 싶다. 내게 짐승이 아닌 진짜 여인으로서의 삶을 깨우쳐준 이분을 이대로 허망하게 놓칠 수는 없어. 이분을 잃는다면 내 숨통도 끊어지는 것이다.'

소희는 어둠 속에서 사내의 넓은 등을 부서질 듯 꽉 끌어안으며, 자신의 남은 인생 전부를 걸고 조선의 여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장 위험하고도 대담한 결심을 향해 마음의 칼을 날카롭게 다지고 있었습니다.

※ 5: 사내와의 위험한 밀회

은밀하고도 목숨을 건 위험한 밀회가 매일 밤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희의 몸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러나 결코 숨길 수 없는 미세하고도 결정적인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매달 어김없이 찾아오던 달거리가 끊긴 지 벌써 보름이 훌쩍 넘었고, 아침저녁으로 입맛이 뚝 떨어지며 비릿한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히는 헛구역질이 반복되었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소희의 얼굴은 탕약의 독한 기운과 밤의 피로 탓에 수척해져 있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생기를 띠며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고목 같았던 그녀의 몸 안에 마침내 새로운 생명이, 그것도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연모하게 된 낯선 사내의 핏줄이 자리 잡았다는 벅찬 환희이자 끔찍한 두려움의 시작이었습니다. 안채를 감도는 시어머니 윤 씨 부인의 시선은 날이 갈수록 집요해졌습니다. 소희의 헛구역질을 눈치챈 시어머니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탐욕스러운 미소가 번졌고, 며칠 내로 한양에서 가장 입이 무겁고 용하다는 한의원을 은밀히 불러 진맥을 짚어보게 하겠다는 일방적인 통보가 떨어졌습니다. 그 통보를 듣는 순간, 소희의 심장은 천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는 듯했습니다. 태기가 확실해진다면, 가문의 핏줄을 얻으려는 시어머니의 소름 끼치는 목적은 완벽하게 달성되는 것이며, 그것은 곧 밤마다 찾아오는 그 다정한 사내와의 영원한 이별, 혹은 사내의 끔찍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내가 별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소희는 평소와는 다르게 짐승처럼 흐느끼며 그의 단단한 품에 다급히 파고들었습니다. 그녀의 얇은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나으리... 나으리... 어찌하옵니까. 제 달거리가 끊긴 지 벌써 보름이 넘었사옵니다. 며칠 전부터 입맛이 없고 헛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 제 몸에, 제 배 속에 나으리의 생명이, 우리의 핏줄이 자리를 잡은 것 같사옵니다."

어둠 속에서 소희의 얇은 속적삼을 애틋하게 쓰다듬던 사내의 손길이 일순간 벼락을 맞은 듯 딱 멈춰 섰습니다. 사내의 가파르고 뜨거운 숨결이 소희의 목덜미에 닿았고, 그의 거대한 몸집이 억눌린 감정으로 미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부인... 그것이 정녕 참말이십니까? 정말로, 정말로 부인의 고귀한 몸에 이 못난 놈의 핏줄을 잉태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예... 시어머니께서도 이미 눈치를 채신 듯,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한의원을 은밀히 불러 저의 진맥을 짚어보겠다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태기가 확실해진다면... 어머님은 두 번 다시 나으리를 이 별당에 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가문의 비밀을 영원히 어둠 속에 묻기 위해 나으리의 목숨을 잔인하게 거두려 자객을 보낼지도 모릅니다. 저는 오늘 낮, 시어머니가 늙은 매파를 불러 '일이 끝나는 대로 그놈의 숨통을 조용히 끊어 산짐승의 먹이로 던져주라'고 밀명하는 것을 문밖에서 똑똑히 엿듣고 말았사옵니다. 나으리, 저는 이 숨 막히는 새장에서 나으리의 귀한 핏줄을 다른 사내의 자식으로 속이며 평생을 위선과 거짓 속에 살 자신이 없사옵니다. 나으리를 잃고서는 단 하루도 숨을 쉴 수가 없사옵니다!"

소희의 두 눈에서 굵은 피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사내의 가슴팍을 흠뻑 적셨습니다. 양반가의 며느리로서 뼈에 새기도록 강요받았던 정절과 가문의 위신 따위는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 하얗게 타버린 한 줌의 재와 같았습니다. 겉으로는 뼈대 있는 명문거족의 꼿꼿한 체통을 외치면서, 뒤로는 며느리를 대리모로 짐승처럼 굴리고 씨내리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앗아가려는 이 시댁의 구역질 나는 위선을 더는 단 1각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병약하여 숨만 쉬는 지아비는 거대한 허수아비일 뿐이었고, 시어머니는 자신을 가문의 권력을 잇기 위한 고깃덩어리로밖에 보지 않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소희를 뼈가 으스러질 듯 꽉 끌어안은 사내의 입술에서 억눌린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부인, 저 역시 부인을 이 지옥 같은 구덩이에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는 결단코 없습니다. 이제야 제 정체를 밝히는 이 못난 놈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본디 안동 땅의 뼈대 있는 양반가 자제로, 제 이름은 이 도령이라 하옵니다. 간신배들의 끔찍한 모함으로 아버님이 억울한 옥사를 치르시고 가세가 멸문지화 직전까지 기울어, 늙고 병드신 홀어머니를 모시고 목숨만 부지하며 근근이 연명하던 중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약값을 구하지 못해 피눈물을 흘리던 찰나, 수치심을 무릅쓰고 거금을 준다는 매파의 꼬임에 넘어가 이 댁 담장을 넘게 되었습니다. 허나, 첫날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떠시던 부인의 가녀린 손을 잡은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제 영혼과 마음은 이미 온전히 부인의 것이 되었습니다. 제 핏줄을 품으신 부인을 이 무덤 같은 지옥에 홀로 남겨둔다면, 저는 당장 혀를 깨물고 자결할지언정 단 하루도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사내의 뼈아픈 고백에 소희는 가슴이 수만 갈래로 미어지는 듯한 슬픔과 동시에 거대한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짐작대로 그는 돈에 미친 짐승 같은 씨내리가 아니라, 효심이 지극하고 건실한 몰락 양반가의 기품 있는 도령이었습니다. 가혹하고도 잔인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만났지만, 그들은 서로의 깊은 상처를 알아보고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영혼을 나누게 된 유일한 구원자였던 것입니다.

"나으리, 아니 서방님. 제발 저를 이 지옥에서 데려가 주십시오. 평생 누려온 부와 명예, 양반가 며느리로서의 헛된 체통 따위는 미련 없이 시궁창에 버리겠습니다. 그저 서방님의 진짜 지어미가 되어 아침저녁으로 가마솥에 따뜻한 밥을 짓고, 우리 아이가 서방님의 품에서 커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만 있다면... 첩첩산중 화전민으로 산비탈을 일구며 굶주린다 해도 저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할 것입니다. 저를 이 위선 가득한 무덤에서 제발 꺼내어 주시옵소서."

소희의 피 끓는 절박한 애원에 사내는 한참 동안 굵은 숨을 몰아쉬며 말이 없었습니다. 한양 최고 부호이자 권세가인 박 대감댁의 며느리를, 그것도 그들의 핏줄을 품은 여인을 야반도주시키는 것은 발각되는 즉시 두 사람의 목이 참수당하고 저잣거리에 내걸릴 끔찍한 대역죄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내의 가슴속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랑하는 여인과 자신의 핏줄을 지켜내야 한다는 사내로서의 본능과 숭고한 책임감이 더 거세고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좋습니다, 부인. 부인의 그 굳은 결심을 제 평생의 목숨으로 받들겠습니다. 내일 밤, 초경(저녁 8시 무렵)이 울리고 안채의 불이 모두 꺼질 무렵. 후원 담장 밑 으슥한 개구멍 쪽에 가장 날랜 말 두 필을 대령해 놓겠습니다. 부인께서 챙기실 수 있는 가장 값나가는 패물들만 몸에 품고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오십시오. 이 썩어빠진 한양 땅을 미련 없이 버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세상 그 아무도 모르는 아주 먼 남녘 땅 끝으로 가서, 부인과 저희 아이를 제 모든 것을 바쳐 완벽하게 지켜내겠습니다. 저를 믿으십니까?"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뜨거운 입술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고 절박하게 포개어졌습니다. 그것은 가문을 잇기 위한 끔찍한 씨내리와 양반가 며느리의 타락한 정사가 아니라, 살아서는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아찔한 문턱을 함께 넘기로 한 두 연인의 세상 가장 숭고하고도 비장한, 피로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 6: 은밀한 탈출과 두 사람의 눈물겨운 언약

이튿날 아침, 박 대감댁 안채에는 동이 트기 무섭게 낮부터 묘하고도 들뜬 긴장감이 폭풍처럼 감돌았습니다. 시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은밀히 뒷문으로 들어온 늙은 한의원이 소희의 진맥을 짚었고, 곧이어 그의 입에서 "경하드리옵니다. 마님, 아주 맥이 튼실하고 강한 것이 틀림없는 태기이옵니다."라는 벅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3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시어머니 윤 씨 부인은 미칠 듯이 기뻐하며 두 손을 모아 하늘에 절을 올렸고, 집안의 하인들에게 즉각 큰 잔치를 준비하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안채와 사랑채 곳곳에는 경사를 알리는 붉은등이 요란하게 내걸렸고, 병약하여 사경을 헤매던 지아비조차 억지로 몸을 일으켜 미음을 삼키는 시늉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끔찍한 환희와 위선의 이면에는, 이제 가문의 핏줄을 잉태시키는 완벽한 용도가 다 끝난 씨내리 사내를 향한 시어머니의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살기가 맹독처럼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늙은 매파를 다시금 안방으로 불러들여 "오늘 밤, 그놈이 담장을 넘고 돌아갈 때 남은 삯을 두둑이 쥐여 주고는, 미리 숨겨둔 무사들을 시켜 산길에서 흔적도 없이 그놈의 목을 쳐라."고 속삭이는 것을 엿들은 소희는 등골이 오싹해지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가문의 더러운 비밀을 영원히 땅속에 묻기 위해 기어이 사내를 무참히 죽일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소희의 발걸음은 벼랑 끝에 선 짐승처럼 다급해졌습니다. 그녀는 꼭두각시처럼 살아야 했던 지난 3년의 끔찍한 세월을 단 한 줌의 미련도 없이 완벽하게 벗어던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회임 소식에 들떠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다 깊이 골아떨어진 틈을 타, 소희는 자신이 시집올 때 친정에서 혼수로 해온, 평생 만져보지도 않았던 귀한 금비녀와 굵은 은가락지, 그리고 값이 나가는 최고급 명주 몇 필을 골라 어두운 색 보자기에 단단히 싸맸습니다. 안채를 빠져나오며 지아비의 방 앞을 지날 때, 피 섞인 마른기침 소리가 잠시 그녀의 발목을 잡는 듯했지만 소희는 매몰차게, 단 한 번의 뒤돌아봄도 없이 고개를 차갑게 돌렸습니다. 그곳에 그녀가 두고 가는 것은 병든 지아비가 아니라, 그녀를 갉아먹던 거대한 무덤 그 자체였습니다.

초경(밤 8시~10시경)을 알리는 묵직한 북소리가 도성에 멀리서 울려 퍼지자, 소희는 짙은 검은 장옷을 머리끝까지 푹 눌러쓰고 발소리를 죽인 채 칠흑 같은 후원 담장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와 바닥에 뒹굴 듯 거세게 요동쳤습니다. 수북이 쌓인 겨울 낙엽을 조심조심 밟으며 마침내 담장 밑 가장 으슥한 개구멍에 다다르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거칠고 다급한 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부인... 저입니다. 이쪽입니다."

개구멍을 빠져나와 고개를 든 소희의 눈앞에, 늘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던 사내가 마침내 복면을 벗고 은은한 달빛 아래서 처음으로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환하게 드러냈습니다. 선이 굵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서책을 읽던 선비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늠름한 무관을 연상케 하는 헌칠하고 건실한 청년이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손끝의 감각과 숨결로만 상상 속에서 수천 번을 그리던 연인의 맑은 얼굴을 온전히 마주한 순간, 소희는 그만 참았던 숨과 함께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그의 넓은 품에 와락 안겨버렸습니다. 청년 역시 소희의 눈물로 얼룩진 차가운 뺨을 애틋하고 뜨겁게 쓰다듬으며 그녀를 제 몸속으로 으스러질 듯 꽉 끌어안았습니다.

"어서 가십시다. 시어머니가 서방님의 목숨을 당장 거두려 피에 굶주린 자객들을 숲에 풀었습니다. 1각이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사옵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희의 가벼운 몸을 번쩍 안아 담장 밖 나무에 묶어둔, 날렵하게 생긴 말 위에 가뿐히 태웠습니다. 두 사람이 탄 두 필의 말은 칠흑 같은 어둠과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한양 도성문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박 대감댁의 그 화려하고 거대한 솟을대문과 기와지붕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소희의 숨통을 옥죄고 짓누르던 무거운 억압과 위선의 차가운 쇠사슬도 한 겹 한 겹 거짓말처럼 끊어져 나가는 듯한 엄청난 해방감이 밀려왔습니다. 무사히 도성의 성문을 빠져나와 인적이 끊긴 첩첩산중의 험한 산길로 접어들었을 무렵,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 등 뒤에서 거센 말발굽 소리와 함께 붉은 횃불의 불빛이 위협적으로 어른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매파를 통해 고용한 전문 자객들이 그들의 뒤를 사냥개처럼 바짝 쫓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으리! 자객들입니다! 저들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습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제 숨통이 완전히 끊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부인과 아이는 무조건 지켜낼 것입니다! 제 등 뒤로 바짝 붙으십시오!"

청년은 말의 속도를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며 산속 깊고 험난한 지름길로 거침없이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지형에 익숙한 자객들의 끈질기고도 맹렬한 추격에, 결국 두 사람은 퇴로가 막힌 깎아지른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몰리고 말았습니다. 횃불을 든 두 명의 덩치 큰 자객이 시퍼런 장검을 빼 들고 짐승처럼 다가왔습니다. 청년은 망설임 없이 말에서 뛰어내려 소희를 자신의 등 뒤로 완벽하게 숨기고, 품속 깊은 곳에서 서늘하게 날이 선 호신용 단검을 빼 들었습니다. 구름을 뚫고 나온 차가운 달빛 아래서, 청년은 목숨을 건 처절한 사투를 벌였습니다. 자객의 장검이 청년의 팔뚝과 허벅지를 깊게 베어 붉고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지만, 청년은 고통의 신음조차 삼킨 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짐승 같은 투지로 자객들의 빈틈을 파고들었습니다. 양반가의 자제라 하나 어릴 적부터 문무를 함께 연마했던 그의 검술은 자객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소희는 피가 튀는 참혹한 광경 앞에 두 손을 굳게 모으고 피눈물을 흘리며 천지신명께 제 목숨을 거두고 서방님을 살려달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챙강 하는 금속음과 함께 청년의 날카로운 칼끝이 마지막 자객의 급소를 찌르고 놈들이 바닥에 고꾸라지자, 소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며 피투성이가 된 청년의 품에 안겨 오열했습니다.

"서방님, 서방님... 저 때문에, 이 못난 지어미 때문에 어찌 이리 험하고 깊은 상처를 입으셨나이까. 피가 멈추질 않습니다!"

"울지 마십시오... 이깟 상처 따위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부인과 저희 아이를 제 손으로 무사히 지켜냈으니, 그것으로 제 사내로서의 도리는 다한 것이며 하늘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 어서 눈물을 거두고 발걸음을 재촉하십시다. 이 지독한 밤이 완전히 지나고 나면 우리는 완벽하게 새로운 세상에서, 온전한 우리만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청년은 자신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대충 옷자락으로 동여매고는, 핏물이 묻지 않은 성한 소매로 소희의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고 다시 그녀를 말에 태웠습니다. 험난한 죽음의 고비를 함께 넘긴 두 사람의 손은 세상 그 어떤 사슬보다 굳건하고 단단하게 맞잡혀 있었고, 그들이 희망을 품고 내달리는 아득한 남녘 하늘의 끝자락에는 기나긴 어둠을 밀어내는 새로운 생명의 새벽안개가 서서히, 찬란하게 걷히고 있었습니다.

※ 7: 옥동자를 안게 된 두 사람의 새출발

한양에서 보낸 자객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몇 달 동안 낮에는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 동굴이나 버려진 사당에 숨어 짐승처럼 지내고, 오직 어둠이 짙게 깔린 밤에만 험하고 날카로운 산길을 걷는 고되고 처절한 도피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신발은 다 해져 발바닥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굶주림에 쓰러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이 마침내 수백 리를 걸어 다다른 곳은 한양의 차가운 권력과는 가장 동떨어진 남쪽 끝의 아늑하고 작은 고을, 남원 땅이었습니다. 지리산의 첩첩산중으로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싸여 한양의 소식이나 관군의 추적조차 쉽게 닿지 않고, 반대로 앞에는 기름지고 드넓은 평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 몸을 숨기고 새로운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인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이 도령'이라 속이고, 소희를 처음부터 함께 고생해 온 자신의 어여쁜 조강지처라 사람들에게 소개했습니다. 비록 가세가 몰락하고 야반도주를 한 처지였지만, 뼛속 깊이 배어 있는 이 도령의 선비다운 꼿꼿한 기품과 다정한 인품, 그리고 소희의 빼어나고 단아한 자태 덕분에 남원 마을 사람들은 낯선 외지인인 두 사람을 아무런 의심 없이 따뜻한 이웃으로 맞아주었습니다.

소희가 시댁에서 목숨을 걸고 챙겨 온 값비싼 순금 비녀와 굵은 은가락지, 그리고 한양 최고급 명주들을 읍내 장터의 가장 큰 전당포에 내다 판 돈은 꽤나 큰 거금이 되어, 두 사람이 낯선 땅에서 흔들림 없이 새로운 터전을 잡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밑천이 되었습니다. 이 도령은 그 귀한 돈으로 마을 외곽의 햇살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아담하고 정갈한 초가집 한 채를 마련했고, 먹고살 걱정이 없도록 기름진 밭 몇 마지기를 너끈히 샀습니다. 한양 최고의 명문거족 맏며느리에서 하루아침에 흙투성이가 된 가난한 평민의 아내가 되었지만, 소희의 맑은 얼굴에는 지난 3년간 그 숨 막히는 기와집 안에서는 단 한 번도 피어난 적 없던 환하고 눈부신 웃음꽃이 매일같이 만발했습니다.

"여보, 서방님. 이른 아침부터 밭에 나가 땀을 흘리실 참이십니까. 꽁보리밥이지만 새참을 따뜻하게 지어 놓았으니 든든히 배를 채우고 가셔요. 서방님의 상하신 손을 볼 때마다 제 가슴이 찢어집니다."

아침 햇살이 비칠 때면, 소희가 산처럼 부른 배를 소중히 감싸 안고 정성껏 지은 구수한 보리밥과 산나물 반찬을 소반에 받쳐 내어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낡은 삿갓을 쓰고 바지장화를 걷어 올린 이 도령은 흙 묻은 손을 옷에 쓱쓱 닦고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희의 고운 손을 덥석 꼭 잡아주었습니다.

"아니, 몸도 이리 무거운데 어찌 아침부터 부뚜막에서 불을 때며 이리 수고를 하시오. 당신은 제발 그저 방 안에서 따뜻하게 편히 쉬고 계시오. 우리 복덩이가 당신의 힘든 노동에 행여 놀라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시오. 이깟 밭일은 내 혼자서도 거뜬히 해낼 수 있소."

이 도령은 비록 평생 붓만 잡아왔지 낫과 괭이를 잡아본 적 없는 귀한 양반가 출신이었으나, 오직 소희와 태어날 자신의 귀한 핏줄을 내 손으로 먹여 살리겠다는 숭고한 일념 하나로, 손바닥에 물집이 수십 번 터지고 피가 나 두꺼운 굳은살이 흉하게 박이도록 밤낮없이 거친 밭을 일구었습니다. 텅 빈 껍데기 같아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던 병약한 전 남편과는 달랐습니다. 검게 그을리고 구릿빛으로 탄탄해진 이 도령의 넓은 어깨와 굵은 땀방울은, 소희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 거대하고 든든한 태산 같은 바람막이가 되어주었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리는 밤이 되면 두 사람은 따뜻한 아랫목 호롱불 아래 마주 앉아 이 도령이 나지막이 읽어주는 옛 시조를 들으며, 남들이 보기엔 평범하고 소박할지라도 그들에게는 피눈물 나게 달콤하고 완벽한 행복을 나누었습니다.

가을바람이 황금빛 들녘을 선선하게 휩쓸고 지나가며 만물이 결실을 맺던 어느 풍요로운 날, 남원의 작은 초가집 안방에서 온 동네를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마침내 터져 나왔습니다. 소희가 그 지옥 같은 시댁에서부터 목숨을 걸고 그토록 애타게 품고 지켜왔던 이 도령의 핏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떡두꺼비 같은 옥동자가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본 것입니다. 방 밖에서 애를 태우며 서성이던 이 도령은 핏덩이 같은 갓난아이를 자신의 떨리는 품에 안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부인... 부인, 정말 고생하셨소. 당신의 그 작은 몸으로 이리도 장군처럼 늠름하고 어여쁜 사내아이를 낳아주시다니... 내 이 아이를 세상 그 어떤 왕후장상도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당당하고 훌륭하게 키워내리다. 목숨을 걸고 저를 선택해 준 당신과 이 아이는, 벼랑 끝에 섰던 내 인생에 하늘이 내려주신 가장 크고 위대한 기적이자 축복이오."

탈진하여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누워있던 소희 역시, 이 도령과 갓 태어난 아기를 번갈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박 대감댁의 그 숨 막히는 안채에서 시어머니의 끔찍한 강요로 짐승처럼 독한 탕약을 삼키고, 칠흑 같은 어둠 속 별당에서 수치심에 떨어야 했던 그 밤의 기억은 이제 마치 아득한 전생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가문의 위선과 억압을 과감히 부수고 진실된 사랑을 쟁취한 소희의 위대한 용기가, 마침내 옥동자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결실로 완벽하게 보답받은 것입니다. 남원 땅에서의 새출발은 두 사람에게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천국으로의 비상과도 같았고, 초가집의 작은 창살 너머로는 그들의 밝은 미래를 축복하듯 찬란한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 8: 몰락한 양반가 도령의 헌신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유수와 같이 평화롭게 흘렀습니다. 남원 외곽에 자리 잡았던 소희와 이 도령의 소박했던 초가집은 이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 도령 특유의 양반다운 타고난 총명함과 앞을 내다보는 혜안, 그리고 뼈를 깎는 지독한 부지런함 덕분에 밭뙈기 몇 마지기로 힘겹게 시작했던 살림은 나날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그는 농사뿐만 아니라 남원과 전주를 잇는 상단과의 거래를 터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제는 남원 일대에서 내로라하는 천석꾼 부호가 된 것입니다. 아흔아홉 칸에 달하는 넓디넓은 번듯한 기와집을 짓고 수십 명의 소작농을 거느리는 대지주가 되었지만, 이 도령은 벼락부자의 교만함을 뽐내거나 사람들을 하대하지 않았고, 특히 자신을 믿고 지옥에서 도망쳐 온 소희를 하늘처럼 떠받들며 세상 누구보다 끔찍이 아끼고 존중했습니다. 험난한 고비를 넘겨 세상에 태어난 그들의 옥동자인 아들 '수'는 외모뿐만 아니라 성품까지 아버지를 쏙 빼닮아 기골이 장대하고 몹시 총명하여, 불과 열 살의 어린 나이에도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며 남원 고을 최고의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이 가문에는 그 어떤 어두운 그림자도, 거짓된 위선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평화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양을 다녀온 남원 상단의 객주가 이 도령의 사랑채에 들러 차를 마시며 털어놓은 이야기 한 자락을 통해, 상상조차 못 했던 놀랍고도 극적인 소식이 이 도령과 소희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십 년 전 한양 도성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사건, 즉 최고의 권세를 자랑하던 박 대감댁의 맏며느리가 귀금속을 몽땅 털어 쥐도 새도 모르게 야반도주한 충격적인 사실이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그 콧대 높던 박 대감댁은 체면이 시궁창에 떨어져 가문의 위상이 걷잡을 수 없이 크게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방치되었던 병약한 지아비는 소희가 떠난 지 불과 1년 만에 피를 한 움큼 토하며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고, 며느리도 잃고 가문의 대를 이을 핏줄도 영영 얻지 못한 시어머니 윤 씨 부인은 하늘을 저주하며 극심한 화병으로 쓰러져, 결국 시름시름 미쳐 앓다가 가장 끔찍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가문의 기둥이 뽑히고 대를 이을 후사마저 완전히 끊어진 박 대감댁의 그 막대한 재산과 수만 평의 토지는, 평소 그들을 시기하던 먼 친척들과 탐관오리들에게 조각조각 뜯어 먹혀 공중분해 되었고, 이제 한양 땅에서 그 화려하고 오만했던 박 대감댁의 위세는 온데간데없이 멸문지화나 다름없는 완벽한 몰락을 맞이했다는 통쾌하고도 참담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날 밤, 이 도령은 안방으로 건너와 소희의 손을 꼭 잡고 한양에서 들은 그 놀라운 소식을 아주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전해주었습니다. 객주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듣고 난 소희의 표정은 박장대소하며 기뻐하거나, 혹은 과거를 불쌍히 여기며 슬퍼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는 10년 묵은 거대한 체증이 완벽하게 씻겨 내려가는 듯한 깊은 해방감과, 동시에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빚어낸 씁쓸한 인과응보에 대한 묘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가문의 헛된 체통과 핏줄을 잇기 위해, 며느리의 정절과 사람의 목숨마저 짐승이나 파리처럼 여겼던 어머님의 그 오만했던 최후가 그리도 비참하고 처절하셨다니... 참으로 인생무상이자 하늘의 무서운 이치이옵니다. 사랑과 진심이 아니라 억압과 위선으로만 겹겹이 쌓아 올린 모래성은, 결국 작은 바람에도 스스로 완벽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법이지요. 그들이 그렇게 지키려던 핏줄도, 재물도 이제는 한 줌의 먼지가 되어버렸군요."

"당신을 그 무덤 같고 지옥 같은 곳에서 도망치게 만든 당신의 결단, 그리고 그 결단을 따른 제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에 하늘과 조상님께 깊이 감사합니다. 만약 우리가 억압에 굴복하여 그 위선 가득한 담장 안에 그저 숨죽여 갇혀 있었다면, 당신 역시 그 무덤 같은 집구석의 몰락과 함께 이름 없이 비참하게 스러져갔을 터... 당신은 스스로 제 손을 잡고 벼랑 끝으로 뛰어내림으로써, 당신의 진짜 찬란한 삶을 기적처럼 되찾은 것이오."

이 도령은 눈시울이 붉어진 소희의 가녀린 어깨를 자신의 넓은 품으로 따뜻하고 단단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소희는 자신의 무릎을 베고 세상 모르고 평온하게 새근새근 잠든 어린 아들 수의 통통한 뺨을 애틋하게 쓰다듬으며, 지난 10년의 세월을 위로하듯 환하고 눈부시게 미소 지었습니다. 며느리를 대리모로 이용해 가문의 대를 이으려 했던 시어머니의 끔찍하고 기괴한 탐욕은 결국 가문의 완전한 몰락이라는 처절하고 비참한 인과응보의 결말을 맞이했지만, 그 가혹하고 잔인한 운명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목숨을 걸고 싹튼 소희와 이 도령의 진짜 사랑은, 죽음을 이겨내고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양반가의 썩어빠진 거짓된 허울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인간의 진실된 감정과 숭고한 사랑을 선택한 두 사람. 그들의 그 은밀하고도 위험했던 밤의 끔찍한 기록은, 억압적인 조선 사회의 위선을 발칵 뒤집을 만큼 파격적이고 통쾌한 승리이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꽃피운 가장 위대한 기적의 이야기로 남원 고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가문의 허울 좋은 체통을 위해 며느리를 짐승처럼 도구로 전락시킨 양반가의 소름 끼치는 비정함. 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피어난 낯선 사내와의 진실된 사랑이 가문의 끔찍한 위선을 통쾌하게 무너뜨리는 짜릿하고도 감동적인 반전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나요? 억압과 굴종에 타협하지 않고 야반도주를 불사하며 진짜 행복을 당당히 쟁취한 소희의 위대한 용기가 가슴 깊은 곳에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남기는 야담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셨다면 잊지 말고 구독과 좋아요, 따뜻한 알림 설정 꾹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응원 한마디는 더 재미있고 놀라운 옛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됩니다. 다음 시간에도 가슴 쫄깃하고 통쾌한 이야기로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