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결하느니 짐승 같은 산적 품에 『고금소총(古今笑叢)』
자결하느니 짐승 같은 산적 품에 『고금소총(古今笑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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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시어머니가 품에 쥐여준 서늘한 은장도 한 자루. 외간 사내가 들거든 망설임 없이 목숨을 끊으라는 잔인한 정절의 증표였지요. 청춘의 피는 뜨거웠으나 그녀의 세상은 위패처럼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비바람 치던 칠흑 같은 밤, 방문을 부수고 험악한 도적이 들이닥칩니다. 떨리는 손으로 칼을 빼든 과부. 허나 달빛 아래 드러난 사내의 짐승 같은 생명력은 얼어 있던 욕망을 단숨에 녹여버립니다. 죽음의 칼날 대신 생명의 온기를 택한 그날 밤, 과부의 방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 1. 시어머니의 서늘한 하사품, 은장도
소복을 입은 여인의 가녀린 그림자가 파르르 떨리는 촛불에 기대어 창호지에 길고 처량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달빛조차 두꺼운 먹구름에 가려 스며들지 못하는 깊고 깊은 밤, 첩첩산중 후미진 곳에 똬리를 틀듯 자리 잡은 뼈대 있는 양반가의 안채는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죽은 듯이 고요했다. 방 안에는 초저녁에 피워두었던 화로의 재상만이 생기를 잃은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날 선 황소바람은 냉기가 감도는 방바닥을 훑으며 여인의 어깨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여인의 나이, 올해로 이제 겨우 스물둘. 봄날의 복숭아꽃처럼 눈부시게 피어나야 할 찬란한 청춘이건만, 그녀의 시간은 혼례를 치른 지 불과 반년 만에 지병으로 피를 토하며 남편이 세상을 떠나던 그날의 잿빛 상여 소리와 함께 완전히 멈춰버리고 말았다.
'오늘 밤도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몹시도 차갑고 매섭구나. 뼛속까지 시려오는 이 길고 긴 밤을 어찌 또 홀로 눈을 뜬 채 지새울꼬...'
여인은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치마폭 깊은 곳을 향해 천천히 손을 밀어 넣었다. 까끌까끌한 속적삼 아래, 명주실로 단단히 매어둔 차가운 쇳덩이가 꽁꽁 언 손끝에 서늘하게 닿아왔다. 은장도였다. 최고급 은으로 정교하고 세밀하게 세공된 칼집에는 엄동설한을 이겨낸다는 매화 무늬가 어지럽고도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지만, 지금의 여인에게 그것은 결코 여인의 맵시를 더해주는 장신구가 아니었다. 언제든 자신의 목숨을 끊어내야만 하는, 보이지 않는 잔인한 오랏줄이자 저승사자의 부름과도 같은 끔찍한 물건이었다. 조심스레 칼집을 매만지는 여인의 귓가에, 며칠 전 안방으로 자신을 불렀던 시어머니의 서릿발 같던 음성이 다시금 환청처럼 생생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가까이 오너라. 그리고 이 물건을 받거라."
그날,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있던 시어머니의 두 눈에는 며느리를 향한 일말의 연민이나 따뜻한 정이라고는 단 한 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가문의 긍지와 양반의 체면만이 번뜩이는 무서운 눈빛이었다.
"너는 뼈대 높은 우리 가문의 하나뿐인 며느리다. 비록 지애비가 박복하여 일찍 세상을 뜨고 너를 홀로 남겨두었으나, 네가 이 집안의 귀신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마저 무덤 속에 함께 묻힌 것은 아니니라. 우리가 사는 이곳은 인적이 드문 산속 깊은 곳이라, 언제 밤손님이 담장을 넘을지, 굶주린 몹쓸 산적 떼가 문을 부수고 들이닥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만에 하나, 털끝만큼의 불상사라도 생겨 외간 사내가 네 방 문지방을 단 한 발짝이라도 넘으려 하거든, 너는 이 은장도를 뽑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네 목숨을 스스로 끊어야 할 것이다. 가문의 역사에 더러운 오점을 남기고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느니, 깨끗한 열녀로 죽어 가문의 자랑이 되고 훗날 열녀문을 하사받는 것이 네가 이승에서 해야 할 마지막 도리니라. 내 말을 똑똑히 알겠느냐?"
"예, 어머님. 며느리 된 도리로서 가슴 깊이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파르르 떨리는 두 손으로 그 무거운 은장도를 받아 들던 자신의 가련하고 처참했던 모습이 떠올라, 여인은 핏기가 가신 얼굴 위로 조용히 뜨거운 눈물을 훔쳐냈다. 시어머니의 찌를 듯한 눈빛은 한겨울 계곡물보다 차가웠고, 은장도에 서린 시퍼런 한기는 여인의 뛰는 심장마저 꽁꽁 얼어붙어 박동을 멈추게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가혹했다. 청상과부의 삶이란 숨을 쉬고 있다 뿐이지 산 송장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소리 내어 웃어도 안 되었고, 기름진 고기나 맛있는 음식을 탐해서도 안 되었으며, 화려한 색깔의 비단옷은 꿈속에서조차 입어볼 수 없는 금기였다. 오로지 창백하게 죽어간 남편의 위패 앞에서 향을 피우며 평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독수공방하는 것만이, 남은 오십 평생 그녀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좁디좁은 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문의 규율로 억누른다 한들, 여인은 아직 피가 뜨겁게 도는 너무도 젊은 여인이었다. 가끔씩 담장 너머에서 따스한 봄바람이 실려와 코끝을 간지럽히거나, 동네 처녀 총각들이 까르르 웃으며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려올 때면, 가슴 한구석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응어리가 치밀어 올라 숨을 막히게 했다. 피가 펄펄 끓는 청춘의 억눌린 본능은, 가문의 명예라는 거대하고 무거운 맷돌에 짓눌려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칼집에서 은장도를 천천히 빼내어 날을 바라보았다. 시퍼렇게 날이 선 서늘한 칼날 위에, 생기를 잃고 퀭한 두 눈을 한 자신의 처연한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져 비쳤다.
'기어이 이 차가운 쇳덩이로 내 여린 목덜미를 찔러 뜨거운 피를 쏟아내야 한단 말인가. 태어나 아직 단 한 번도 제대로 피어보지 못한 꽃봉오리인데, 사내의 품이 이리 따뜻한 것인지 저리 차가운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불쌍한 몸뚱이인데... 그저 이름 석 자 남지 않을 가문의 헛된 명예를 위해, 이 칼날에 내 생때같은 젊은 피를 적셔야만 끝이 난단 말인가...'
설움이 파도처럼 북받쳐 올랐다. 하늘을 원망할 수도, 시어머니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야속하게도 여인의 몸으로 태어난 죄, 명줄 짧은 사내를 지애비로 만난 자신의 박복한 팔자려니 생각하며 스스로의 가슴을 치고 위로할 뿐이었다. 밤새 소쩍새 우는 소리만 처량하게 창문을 때리는 깊은 산골의 외로운 독수공방. 여인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은장도를 다시 품속 깊은 곳에 찔러 넣고는, 무릎을 가슴까지 바짝 끌어안은 채 차가운 흙벽에 기대어 한껏 몸을 웅크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지독하고 긴 어둠의 터널 속에서, 그녀의 청춘은 물기 없는 낙엽처럼 서서히 바스러져 가고 있었다.
※ 2. 비바람 몰아치는 밤, 방문을 부수고 들어온 불청객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초저녁부터 음산하게 깔리던 먹구름이 기어이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엄청난 장대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끈적하고 무더웠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내렸고, 달과 별을 모두 집어삼킨 천지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친 듯이 울부짖는 성난 바람은 낡은 기와지붕을 들썩이게 했고, 창호지가 금방이라도 갈기갈기 찢어질 듯 안채의 방문을 거세게 흔들어댔다. 넓은 마당 한가운데 심어둔 수십 년 된 고목나무조차 거센 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허리가 꺾일 듯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비명을 질렀다. 처마 밑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는, 마치 누군가 커다란 주먹으로 방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처럼 불길하고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안채 제일 구석진 곳, 작은 방에 홀로 앉아 있던 여인은 밀려드는 짐승 같은 불안감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얇은 명주 이불을 꽉 끌어안았다.
'무슨 비바람이 이리도 세상이 끝날 것처럼 무섭게 분단 말인가. 하늘이 노하여 천지가 진동하는구나. 제발 무사히 이 밤이 지나가야 할 터인데...'
방 안을 간신히 밝히고 있던 작은 등잔불마저 문틈으로 파고드는 거친 바람에 춤을 추듯 흔들리며 꺼질 듯 말 듯 위태로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굶주린 산짐승이 먹이를 찾아 울부짖는 듯한 기괴한 바람 소리에, 여인은 차마 자리에 눕지도 못하고 방구석에 웅크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밖의 소음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우당탕탕! 쿵!
마당 너머 외곽 쪽에서 무언가 묵직하고 육중한 것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귓전을 때렸다.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헉 하고 깊이 들이켰다.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비바람에 나뭇가지가 부러진 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누군가 높은 흙담장을 넘어 질척이는 마당으로 육중한 몸을 던지는 소리였다. 여인의 가슴속 심장이 터질 듯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거센 빗소리에 섞여, 진흙탕을 밟는 투박하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질척, 질척, 하며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정확히 여인이 숨죽이고 있는 안채 구석방을 향해 좁혀져 오고 있었다.
'누, 누구지? 이 폭풍우가 치는 한밤중에... 설마... 어머님이 말씀하시던 흉악한 산적?'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시어머니의 그 서슬 퍼런 경고가 환청처럼 뇌리를 스쳤다. 산속 깊은 곳이라 언제 험악한 밤손님이 들지 모른다는 그 끔찍한 말이,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그녀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여인의 가녀린 손은 반사적으로 치마폭 속으로 들어가 품속의 은장도를 향했다. 차가운 은제 칼집을 꽉 쥐었지만, 손끝은 제멋대로 덜덜 떨리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는 마루를 쿵쿵 밟고 올라와, 어느새 굳게 걸어 잠근 여인의 방문 바로 한 뼘 앞까지 다가와 우뚝 멈춰 섰다. 얇은 창호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사내의 거칠고 뜨거운 숨소리가 훅, 훅, 하고 방 안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이리 오너라! 비바람이 이리도 거센데 안에 숨죽이고 있는 놈은 아무도 없는 게냐!"
마치 산속을 호령하는 성난 호랑이의 포효처럼 굵고 우렁찬, 쇳소리가 섞인 사내의 목소리였다. 여인은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방구석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대답이 없자, 문밖의 사내는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다는 듯 거침없이 방문을 향해 엄청난 힘을 가했다.
우지끈! 콰아앙!
굳게 잠겨 있던 무쇠 문고리가 단번에 맥없이 튕겨 나가며, 육중한 나무 방문이 산산조각 날 듯 박살 나며 활짝 열려젖혀졌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매서운 비바람이 방 안으로 폭풍처럼 들이닥쳤고, 춤을 추던 등잔불은 순식간에 푸쉬쉭 소리를 내며 완전히 꺼져버렸다. 완전한 어둠. 하지만 곧이어 하늘을 가르는 번개가 번쩍이며 내리쳤고, 그 찰나의 푸른 불빛 속에서 문가에 버티고 선 거대한 불청객의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보통 사내의 두 배는 됨직한 떡 벌어진 태산 같은 어깨, 천장에 닿을 듯 훌쩍 큰 키, 헝클어진 상투 아래로 야수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 머리부터 발끝까지 빗물에 흠뻑 젖은 사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매서운 눈초리로 방 안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방구석에서 하얗게 질린 채 소복을 입고 벌벌 떨고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는, 입가에 묘한 흥미를 띤 미소를 지었다.
"허허, 이런 인적 없는 첩첩산중 썩어가는 기와집에, 이리도 눈부시게 고운 과부댁이 숨을 죽이고 있을 줄이야. 비를 피하러 들어왔거늘, 생각지도 못한 귀한 횡재를 하였구나."
사내가 질척이는 진흙이 잔뜩 묻은 짚신을 벗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마루를 넘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비 냄새와 흙내음, 땀 냄새, 그리고 짐승처럼 날것의 사내 특유의 짙은 체취가 훅 끼쳐오며 좁은 방 안의 공기를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여인은 기를 쓰고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차가운 흙벽에 등이 닿아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사내가 장작 같은 굵은 팔을 뻗어 여인의 어깨를 와락 움켜쥐려 하는 찰나, 여인은 필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마침내 품속에서 은장도를 빼 들었다.
"다, 다가오지 마시오! 내 몸에 털끝 하나라도 닿았다간, 단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이 칼로 내 목을 깊숙이 찔러 그 자리에서 자결할 것이오!"
은장도를 꽉 쥔 두 손이 미친 듯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은장도의 시퍼런 칼날은 번개 빛을 머금고 서늘하고도 섬뜩한 빛을 뿜어냈다. 사내는 여인의 돌발 행동에 잠시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는 듯하더니, 이내 가소롭다는 듯 굵은 목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허허, 제법 당돌하고 독기 품은 여인이로고. 허나 그 조그만 장난감 같은 은장도로 대체 뉘 목을 찌른단 말이냐? 양반 가문의 얼어 죽을 명예니, 이름뿐인 열녀니 하는 헛소리에 속아 넘어가 그 곱고 아까운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 하다니, 가엾고도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사내는 여인의 목숨을 건 위협에도 전혀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천천히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여인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칼끝을 자신의 하얀 목덜미로 가져갔다. 손에 조금만 힘을 주어 찌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막상 얼음장 같은 칼끝이 여린 살갗에 닿자,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와 생에 대한 원초적인 미련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손에 쥐가 날 것 같았지만 정작 찌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칼을 쥔 손은 사정없이 흔들렸고, 크고 맑은 눈망울에서는 공포와 서러움이 뒤섞인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려 소복 앞섶을 적셨다. 사내는 그런 여인의 위태로운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또 한편으로는 깊은 연민과 욕망이 뒤섞인 강렬한 눈빛으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미친 듯이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박살 난 작은 방 안에서는 삶과 죽음, 그리고 사내와 여인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긴장감이 거세게 충돌하며 숨 막히는 정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 3. 은장도를 버리고 사내의 품으로 뛰어들다
사내와 여인 사이의 거리는 이제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만큼 바짝 좁혀져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하늘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미친 비바람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난장판이 된 방 안은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조차 메아리쳐 들릴 만큼 기이하고도 팽팽한 정적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여인은 덜덜 떨리는 이를 악물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은장도를 쥔 양손에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끌어모으려 안간힘을 썼다.
'어머님, 며느리는 가문의 가르침대로 불경한 일을 당하기 전 여기서 이만 목숨을 끊어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저승에 있는 지애비 곁으로 무사히 가도록 용서하시옵소서...'
바르르 떨리는 칼끝이 막 하얀 목덜미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려는 찰나, 먹구름이 거칠게 걷히며 숨어있던 보름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박살 난 방문 틈으로 쏟아져 내린 창백하지만 강렬한 달빛이, 방 한가운데 우뚝 선 사내의 거대한 몸집을 비추었다. 젖은 삼베 옷자락이 풀어헤쳐진 사이로 훤히 드러난 사내의 태산 같은 가슴팍, 바위처럼 단단하고 굵은 팔뚝, 그리고 빗물과 땀에 젖어 야성적으로 번들거리는 구릿빛 피부. 그것은 죽음의 짙은 그림자 속에 갇혀 향냄새만 맡으며 시체처럼 살아가던 여인에게는 평생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그야말로 압도적이고도 폭발적인 '생명력' 그 자체였다. 거칠게 오르내리는 사내의 넓은 가슴팍에서 훅, 훅 뿜어져 나오는 펄펄 끓는 짐승 같은 열기가, 여인의 창백하게 얼어붙은 뺨을 사정없이 때리며 그녀를 흔들어 놓았다.
"눈을 떠보아라, 여인아."
사내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빗장 문을 부수고 들어오며 호령하던 아까의 위협적인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묘하게 부드러우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묵직하고 끈적한 음성이었다.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찌르려던 손의 힘을 풀고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두 눈빛이 화로 속 숯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분명 굶주린 산짐승의 거친 눈빛이었지만, 그 깊은 곳에는 가련한 과부를 향한 묘한 연민과, 결코 숨길 수 없는 사내로서의 뜨거운 욕망이 지독하게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미 땅속에서 썩어가며 흙이 된 죽은 자를 위해, 심장이 이리도 뜨겁게 뛰고 있는 산 자가 목숨을 버리는 것이 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도리란 말이냐. 네 고운 살결 아래 흐르는 그 뜨거운 피가, 네 스스로도 미치도록 아깝고 애통하지 아니하냐?"
사내가 토해낸 그 한마디 말이, 마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여인의 굳게 닫혀있던 가슴 한가운데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것은 지난 수년간 홀로 밤을 지새우며 꾹꾹 눌러 담아왔던, 스스로도 죄책감에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외면하려 했던 원초적이고도 본능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왜 살아있는가? 무엇을 위해 내 몸을 옭아매고 이토록 숨을 죽인 채 유령처럼 지내야 한단 말인가? 사내의 거칠고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스치고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여인의 몸속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짜릿한 전율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며 피어올랐다. 그것은 결코 죽음을 앞둔 자의 공포가 아니었다. 십 대 후반에 시집와 남편의 병수발만 들다 과부가 된 그녀가, 지난 수년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아니 철저하게 죽여두었던 '여인'으로서의 본능이자 펄펄 끓어오르는 젊은 생명력의 격렬한 꿈틀거림이었다.
'이 사내... 이상하게도 무섭지가 않다. 흉측한 도적놈일 터인데, 오히려 내 목을 조르는 저 서늘한 은장도보다 이 사내가 뿜어내는 이 뜨거운 기운에 내 몸과 마음이 한순간에 녹아내려 버릴 것만 같아...'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얕았던 호흡이 거칠고 가빠지기 시작했다. 눈물에 젖은 소복 앞섶이 가쁜 숨을 따라 크게 오르내렸다. 연약한 목을 찌르려 바짝 다가갔던 은장도의 칼끝이 서서히 목표를 잃고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더니, 이내 힘이 빠져 아래로 툭 하고 쳐지고 말았다. 자신을 억누르던 시어머니의 서늘하고 무서운 얼굴과, 가문의 명예, 양반의 체통이라는 허울 좋고 거창한 단어들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눈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선 짐승 같은 사내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강렬한 수컷의 향기 앞에서는 한낱 안개처럼 허무하게 흩어져 버렸다. 차갑고 뻣뻣한 가문의 이념보다는, 당장 닿을 듯이 가까운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뜨거운 사내의 체온이 그녀에겐 수백 배는 더 절실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들이마신 짙은 사내의 냄새는 너무도 달콤하고, 강렬하며, 치명적이었다.
사내가 천천히 굵은 손을 뻗어, 덜덜 떨며 은장도를 쥐고 있는 여인의 작고 하얀 손을 통째로 겹쳐 감싸 쥐었다. 굳은살이 박여 거칠고 투박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어떤 비단보다 부드럽고 화로처럼 뜨거운 손길이었다. 여인은 반항하지 않았다. 아니, 반항할 힘조차 이미 그녀의 몸에서 모두 빠져나가 버린 지 오래였다. 사내는 굳어있는 여인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하나씩 펴내어, 그녀의 손에서 그 지긋지긋한 은장도를 완전히 빼앗았다. 그리고는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 방바닥 저 멀리 구석을 향해 쇳덩이를 힘껏 던져버렸다.
챙그랑!
서늘하고도 날카로운 쇳소리가 방 안을 울리며, 지난 수년간 여인의 온몸을 옥죄고 있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사슬도 함께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져 내렸다. 은장도가 그녀의 손을 떠나 버려진 그 순간, 여인은 비로소 태어나 처음으로 깊은 숨을 내쉴 수 있을 것 같은 완벽한 해방감을 느꼈다. 사내의 두꺼운 두 팔이 곧바로 여인의 가는 허리를 와락, 그리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차가운 소복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사내의 터질 듯 단단한 근육과 불덩이 같은 체온에, 여인은 그만 눈을 감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밤, 짐승 같은 내가 널 위해 기꺼이 네 지애비가 되어 주마. 수년간 가슴속에 참아왔던 그 억눌린 숨을 모조리 다 내 품에 토해내거라."
사내의 거칠고 마른 입술이 여인의 하얀 목덜미에 뜨겁게 닿았다. 여인은 그간 참아왔던 온갖 서러움과 환희가 뒤섞인 눈물을 왈칵 터뜨리며,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뻗어 사내의 넓고 젖은 등허리를 터질 듯이 꽉 끌어안았다. 수년간 시퍼렇게 얼어붙어 있던 빙산이 한순간에 녹아내려 거세고 뜨거운 탁류가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여인은 스스로 떨리는 손을 올려 단정하고 답답하게 매어져 있던 소복의 하얀 옷고름을 풀어 내렸다. 밖에서 몰아치는 비바람조차도, 지금 이 순간 미친 듯이 얽혀드는 두 사람의 숨 막히는 열기를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과부의 방 안에는, 폭풍우 소리를 집어삼키는 원초적이고도 본능적인 사랑의 몸짓이 밤이 새도록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 4. 폭풍이 지나간 자리, 싹트는 묘한 감정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미친 듯이 휘몰아치던 밤의 폭풍우가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물러간 다음 날 아침. 먹구름이 걷힌 맑고 푸른 하늘에서는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밤새 비바람에 씻겨 내려간 산사에는 이름 모를 산새들의 청아한 지저귐이 메아리치며, 산산조각이 나서 덜렁거리는 방문 틈 사이로 스며들어와 난장판이 된 방 안의 무거운 고요를 부드럽게 깨웠다. 박살 난 문풍지 사이로 비껴 들어온 따스한 볕은, 어젯밤 짐승처럼 격렬하고 원초적이었던 두 남녀의 뒤엉킨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좁은 방바닥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밤새도록 몰아친 거친 숨결의 여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방 안 공기는 묘하게도 달콤하고 나른했다.
이불도 덮지 못한 채 지쳐 쓰러져 있던 여인은, 뺨을 간지럽히는 아침 햇살에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온몸의 뼈마디가 녹아내린 듯 뻐근하고 나른했지만, 그 감각은 결코 고통스럽거나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년간 꽁꽁 얼어붙어 피가 통하지 않던 죽은 몸뚱이에 비로소 뜨거운 생명의 피가 구석구석 돌아나가며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듯한, 실로 벅차고 경이로운 감각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꽉 차게 들어온 것은, 자신의 가느다란 허리를 빈틈없이 단단하게 감싸 안고 있는 굵고 거친 사내의 구릿빛 팔뚝이었다.
'아아... 정녕 이 모든 것이 어젯밤 나의 헛된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내 곁에, 내 살갗에 닿아 뜨겁게 숨을 쉬는 사내가 이리 떡 하니 안고 있다니...'
여인은 혹여나 사내가 깰세라 숨죽인 채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곤히 잠든 사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간밤 방문을 부수고 들어오며 살기를 뿜어내던 그 사납고 거칠던 짐승 같은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 그녀의 눈앞에는 마치 험난한 세상 풍파에 지쳐 쓰러져 잠든 가엾은 어린아이처럼 평온하고 무방비한 얼굴로 색색 숨을 내쉬는 한 사내가 있을 뿐이었다. 굵고 뚜렷한 선을 가진 이목구비, 턱 밑과 뺨을 덮을 만큼 거뭇거뭇하게 자라난 거친 수염, 그리고 뙤약볕과 비바람에 그을리고 상처 입은 단단한 피부. 그것은 평생 방 안에서 책장만 넘기며 글공부만 하느라 창백하고 병약하여 밤바람만 불어도 기침을 쏟아내던 죽은 남편에게서는, 단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었던 강인하고도 듬직한 진짜 사내의 모습 그 자체였다.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손을 뻗어, 사내의 투박하고 거친 뺨을 조심스레, 아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손끝에 닿는 까슬까슬한 수염의 촉감조차 너무도 신기하고 애틋하여 눈시울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사내의 어깨를 넘어 방구석으로 향했다. 어젯밤, 사내가 그녀의 손에서 빼앗아 힘껏 던져버렸던 문제의 은장도가, 깨진 문짝에서 떨어진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너무도 초라하고 볼품없는 쇳덩어리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한다던 가문의 뼈대 높은 명예, 지애비를 따라 죽어야 마땅하다는 며느리의 잔인한 도리, 그리고 그녀의 목통을 쥐고 흔들던 시어머니의 서슬 퍼런 눈빛... 어제 초저녁까지만 해도 거대한 태산처럼 그녀를 짓누르고 옥죄던 그 절대적인 철칙들이, 이제는 저 구석에 내팽개쳐진 한낱 장신구보다도 못한 쓰레기처럼 우습고 부질없게 여겨졌다. 숨을 죽인 채 정절을 지키며 귀신처럼 살아가는 칭송받는 열녀의 삶보다, 비록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한 몸에 받을지언정 서로의 살갗을 비비며 이토록 뜨거운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이, 그녀에게는 천 배 만 배는 더 소중하고 절실했다. 과부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던 여인의 창백했던 입가에, 아침 햇살을 머금은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미소가 서서히 번져나갔다.
그때였다. 뺨을 어루만지는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에 잠이 깬 사내가 굵은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몽롱한 눈을 깜빡이던 사내는, 자신의 너른 품에 안긴 채 아침 햇살을 받으며 천녀처럼 고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마주하더니, 번쩍 정신이 든 듯 흠칫 놀라며 황급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런, 낭패로다. 벌써 날이 이리 밝아버리다니. 내 간밤에 폭우를 피하려다 그만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짐승처럼 굴어, 지체 높은 부인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끔찍한 죄악을 짓고 말았소."
몸을 일으킨 사내의 목소리는 간밤의 위협적이고 오만했던 태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자신을 책망하는 깊은 죄책감과, 여인을 향한 진심 어린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따뜻한 음성이었다. 겉모습은 험악한 산적과 다를 바 없이 투박했지만, 그 속에 담긴 여인을 향한 깊은 배려와 걱정이 여인의 가슴 한구석을 뭉클하게 적셨다. 여인은 흐트러진 속적삼의 깃을 조심스레 여미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옵니다. 어찌 감히 죄라 하십니까. 오히려... 숨만 붙어 있었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이 시들어가던 저를, 다시금 사람답게 숨 쉬게 만들어 주신 귀한 분이십니다. 어머님의 명에 따라 차가운 은장도로 제 목을 찔러 원통한 귀신이 될 뻔했던 저를, 기꺼이 당신의 뜨거운 품으로 안아 이승의 따뜻한 사람으로 다시 끌어당겨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간밤의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사옵니다."
수줍지만 단호한 여인의 고백에, 사내는 할 말을 잃은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굵고 거친 두 손으로 여인의 가녀린 손을 푹 감싸 쥐었다.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투박한 손이었지만, 그 어떤 부드러운 비단결보다도 따뜻하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사내는 여인의 맑은 눈동자를 깊이 응시하며 무거운 입술을 뗐다.
"나는 그저 이 산 저 산을 떠돌며 연명하는 천한 도적놈에 불과하오. 세상의 인심이 하도 흉흉하고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심하여 배를 곯다 못해, 관아의 곡식 창고를 털고 산속으로 숨어들어 쫓기는 비루한 신세지. 허나, 내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간밤에 부인과 나눈 그 뜨거운 정은 내 평생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곱고 따뜻한 부인을, 내 어찌 잊고 살 수 있겠소."
말을 마친 사내는 서둘러 널브러진 젖은 옷자락을 주워 입고, 허리춤에 자신의 칼을 단단히 묶어 찼다. 날이 완전히 밝아 사람들이 깨어나기 전에 서둘러 험한 산속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겨야만 관군의 매서운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인은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사내의 넓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가슴이 두 갈래로 찢어질 듯한 지독한 아쉬움과 슬픔을 느꼈다. 이대로 문밖을 나서면, 어쩌면 평생 다시는 이 사내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잔인한 불안감이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이대로 영영 가시려는 겝니까? 제가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부디... 뉘신지 이름 석 자라도 제게 알려주고 가시옵소서."
부서진 문지방을 훌쩍 넘으려던 사내가 여인의 애절한 목소리에 멈칫하더니,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사내의 호랑이 같은 눈빛에는 떠나야만 하는 깊은 아쉬움과 함께, 무언가 굳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내 이름은 돌쇠라 하오. 양반들 귀에는 비웃음을 살 만한 천박하고 흔한 이름이지만, 적어도 부인 앞에서는 거짓 없는 당당한 사내이고 싶구려. 보름 뒤, 저 앞산 너머로 둥근 보름달이 차오르는 밤에 내 반드시 이 방으로 다시 오겠소. 그때까지 부디 밥 거르지 마시고 옥체 성히 계시오."
사내는 그 맹세 같은 말을 끝으로, 부서진 방문을 훌쩍 넘어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질척이는 마당을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그리고는 짐승처럼 날쌘 몸놀림으로 높은 흙담장을 단숨에 훌쩍 넘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여인은 사내가 사라진 담장 너머의 허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사내가 남기고 간 짙은 수컷의 체취와 거친 숨결을 아주 오래도록 가슴 깊이 음미했다. 방구석에 내동댕이쳐진 은장도 위로 한 줄기 찬란한 아침 햇살이 떨어지며 반짝이고 있었다. 더 이상 그 칼은 그녀의 목숨을 앗아갈 끔찍한 흉기가 아니라, 그녀를 얽매던 낡고 부패한 과거를 시원하게 끊어낸 해방의 상징으로 보였다. 여인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펄펄 끓어오르는 생명력과 함께 돌쇠라는 그 투박한 사내를 향한 맹렬하고 애틋한 그리움이 뿌리를 내리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 5. 도적의 두 번째 방문과 발각의 위기
사내가 떠난 후, 양반가 안채에 갇힌 여인의 삶은 겉보기에는 예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평온하고 단조롭게 흘러갔다. 여전히 눈을 뜨면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고, 깐깐한 시어머니의 찌를 듯한 감시와 엄한 질책을 묵묵히 견뎌내며, 때맞춰 사당에 들어가 죽은 남편의 위패를 정성껏 닦는 숨 막히는 일상이 쳇바퀴 돌듯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겉모습이 아닌 그 깊은 속내마저 예전과 같다고 믿는다면 오산이었다. 텅 비어 스산한 바람만 불던 가슴 속에는 어느새 '돌쇠'라는 거칠고 매력적인 사내의 뜨거운 온기가 거대한 화로처럼 붉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언제나 수심에 잠겨 우울하기만 했던 탁한 눈동자에는 별빛 같은 총명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인적 없는 밤, 조용히 청동 거울을 꺼내어 비춰본 자신의 모습은 더 이상 죽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처량하고 불쌍한 청상과부가 아니었다. 봄을 맞은 복숭아꽃처럼 뺨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예쁘게 피어올랐고,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은 잘 익은 앵두처럼 붉고 윤기 나게 생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사랑을 품은 여인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여인의 이토록 미세하고도 아름다운 변화는, 한평생 양반가의 법도를 지키며 매의 눈으로 집안을 호령해 온 노회한 시어머니의 날카로운 감시망을 결코 피할 수 없었다. 돌쇠가 다녀간 지 열흘 남짓 지났을 무렵, 대청마루에 꼿꼿이 앉아 바느질을 하던 시어머니가 마당을 쓸고 있는 며느리를 위아래로 뱀처럼 훑어보며, 갑자기 얼음장같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네 이년,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어찌 된 영문인지 네 안색이 요 근래 들어 부쩍 좋아 보이는구나. 상을 당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과부 년의 얼굴에 그리 붉은 화색이 돈단 말이냐! 이는 필시 네 년의 썩어빠진 마음속에 요망하고도 음탕한 바람이 단단히 들었다는 증거가 아니냐. 설마 밤마다 뒷간을 오가며 사내 품을 그리는 헛된 상상이라도 하며 발정 난 개처럼 구는 게냐? 내 말을 똑똑히 명심해라! 네 년의 품에는 내가 하사한 은장도가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만에 하나 가문의 먹칠을 할 딴맘을 먹었다간, 내 네 년을 당장 멍석에 말아 뼈가 으스러지도록 타작을 하여 집 밖으로 내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아, 아니옵니다, 어머님! 어찌 감히 며느리가 그런 더럽고 불경한 생각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요 며칠 밤낮으로 일교차가 심하여 밤잠을 설쳤더니, 속에 몹쓸 열이 올라 뺨이 붉어진 것뿐이옵니다. 용서하시옵소서!"
여인은 혼비백산하여 들고 있던 빗자루를 내동댕이치고 마당 흙바닥에 납작 엎드려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어머니의 그 서슬 퍼런 질책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돌쇠가 오기로 약속했던 보름밤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심장 저 밑바닥에서부터 묘한 기대감과 환희가 위험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시간은 더디지만 어김없이 흘러, 마침내 돌쇠와 약속했던 보름날 밤이 찾아왔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둥근 보름달이 뭉게구름 사이로 환한 얼굴을 내밀며, 고요에 잠긴 기와집 안채 마당을 은은하고도 신비롭게 비추어 주었다. 여인은 안방의 불이 꺼지고 시어머니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목욕재계를 한 뒤 가장 깨끗하고 고운 하얀 속적삼으로 갈아입었다. 행여나 작은 빛이라도 새어 나갈까 방의 등잔불을 가장 낮게 줄이고, 창호지 문에 귀를 바짝 댄 채 밖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부엉, 부엉- 부엉-
적막을 깨고 산짐승의 구슬픈 우는 소리가 정확히 세 번, 마당 쪽에서 울려 퍼졌다. 그것은 사내가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리는 은밀한 신호였다. 여인이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조심스레 열자, 쏟아지는 달빛을 등지고 선 태산처럼 늠름한 그림자가 흙담장에서 마당으로 표범처럼 사뿐히 뛰어내렸다. 그녀가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던 돌쇠였다. 사내는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방문 앞에 선 여인을 부서질 듯 꽉 품에 와락 안아버렸다.
"부인, 늦지 않게 내 약속대로 이리 왔소. 그간 아무 탈 없이 무고하셨소?"
"기다렸습니다... 하루가 십 년 같아, 매일 밤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저 달이 둥글게 차오르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사옵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목을 끌어안고 굶주린 짐승처럼 입술을 탐하며 비좁은 방 안으로 쓰러지듯 굴러 들어갔다. 장장 보름이라는 억겁의 시간 동안 억눌러왔던 지독한 갈증과 미칠 듯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두 사람의 몸은 창백한 달빛이 쏟아지는 방바닥 위에서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격렬하게 얽혀 들었다. 사내의 투박하고 거친 손길이 여인의 하얀 살결을 어루만지고 스칠 때마다, 여인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아찔한 환희에 젖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비좁은 과부의 방 안은 두 사람이 내뿜는 가쁜 숨소리와 은밀하고도 끈적한 교성으로 가득 채워져 폭발할 것만 같았다.
바로 그 절정의 순간이었다. 안채 마당 쪽, 시어머니가 기거하는 안방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나더니, 이내 누군가 고무신을 끌며 걸어오는 바스락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며느리, 네 이년! 이 야심한 밤중에 잠을 자지 않고 방구석에서 대체 무얼 하는 게냐? 바깥까지 요상하고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오니, 필시 방 안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게로구나!"
시어머니의 칼날처럼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고 여인의 방문 앞까지 날아들었다. 순간, 쾌락에 젖어 얽혀 있던 방 안의 두 사람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숨을 헉 들이켜며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얼어붙었다. 여인의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가 가시며 하얗게 질려버렸고, 사내 역시 눈을 부릅뜨고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짐승처럼 몸을 긴장시키며 허리춤에 벗어둔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사각, 사각, 마당의 모래를 밟는 시어머니의 불길한 발걸음 소리는 멈추지 않고 점점 여인의 방문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끝이구나... 모든 것이 끝났어. 여기서 발각된다면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죄로 나는 멍석말이를 당해 맞아 죽을 것이고, 이 사내 역시 관아에 끌려가 목이 잘리거나 이 자리에서 몰매를 맞아 억울한 죽음을 면치 못할 터...'
여인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혔지만, 사내가 칼을 뽑으려는 순간 번쩍 정신을 차렸다.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던 자신이 죽는 것은 이제 와서 조금도 두렵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참된 사랑을 알려주고 생명을 불어넣어 준 이 듬직한 사내마저 이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개죽음당하게 내버려 둘 수는 절대 없었다.
"도, 도련님... 아니, 돌쇠님. 지금 당장 저기 놓인 병풍 뒤로 몸을 숨기시지요! 제발 숨소리조차 내시면 아니 되옵니다!"
여인은 사색이 된 얼굴로 사내를 밀어붙여 방구석에 세워둔 낡은 병풍 뒤로 욱여넣다시피 숨겼다. 그리고는 흩어진 하얀 속적삼과 치마를 순식간에 주워 입고,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긴 뒤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썼다. 그리고 방바닥을 이리저리 뒹굴며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스러운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오... 어머님, 저 며느리이옵니다. 늦은 저녁부터 갑자기 배를 찌르는 듯한 복통이 심하게 일어, 차마 잠에 들지 못하고 이리 방구석을 미친 듯이 뒹굴며 앓고 있었사옵니다. 아이고, 배야..."
쿵, 쿵. 방문 바로 앞 마루까지 다가온 시어머니의 꼿꼿한 그림자가 창호지에 길고 무섭게 드리워졌다.
"복통이라고? 흥! 네 년이 제사상에 올릴 음식이라도 몰래 훔쳐 먹다 단단히 체하여 탈이 난 게로구나. 당장 문을 열어보아라! 내 들어가서 네 년의 상태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시어머니의 차가운 명령과 함께 문고리가 덜컥거리며 방문이 막 열리려는 찰나, 여인은 필사적으로 이불을 쥐어뜯으며 짐승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안 되옵니다, 어머님! 제발 문을 열지 마시옵소서! 지금 속이 미친 듯이 뒤틀려 당장이라도 구토와 설사가 사방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사옵니다. 이리 추레하고 똥오줌이 묻은 흉한 꼴을 어찌 지체 높으신 어머님께 감히 보여드릴 수 있겠습니까. 조금만 참으며 배를 문지르면 가라앉을 듯하오니, 며느리 걱정은 거두시고 제발 침소로 돌아가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아이고오, 배야..."
땀을 뻘뻘 흘리며 처절하게 쥐어짜 내는 여인의 혼신을 다한 연기에, 문밖에 서 있던 시어머니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침묵을 지켰다. 방문 문고리를 잡고 한참을 벼르던 시어머니는, 마치 방 안에서 진짜 역겨운 오물 냄새라도 맡은 양 얼굴을 구기며 쯧쯧 혀를 강하게 찼다.
"쯧쯧, 천박하게 먹을 것을 몰래 탐하더니 꼴이 아주 볼만하구나. 과부 년이 밤중에 곡소리를 내어 집안의 기운을 다 망치고 있으니 원. 내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다 낫지 않으면 동네 의원을 불러 침을 놓을 것이니, 그 더러운 입 다물고 조용히 앓거라!"
탁, 고무신을 거칠게 돌려 신는 소리에 이어 마침내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 그 서슬 퍼런 시어머니가 다시 안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자, 그제야 여인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걷어차고 바닥에 엎드린 채 깊고 긴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입고 있던 속적삼은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병풍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내 역시 식은땀을 닦아내며 조심스레 걸어 나와,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떠는 여인을 말없이 강하게 껴안아 주었다. 죽음의 문턱을 간신히 넘긴 두 사람의 가슴팍이 맞닿은 채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 위태롭고 숨이 막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양반가의 담장 안에서는, 더 이상 그들의 목숨 건 사랑을 온전히 키워나갈 수 없다는 잔인한 현실을 두 사람 모두 너무나도 뼈저리게 직감하고 있었다.
※ 6. 담장을 넘어 새로운 삶을 향해 도망친 두 남녀
시어머니의 발소리가 완전히 끊기고 안방의 불이 꺼졌지만, 여인의 작은 방 안에는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는 무겁고 서늘한 정적이 짙게 내려앉았다. 기지를 발휘하여 끔찍한 발각의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는 안도감도 아주 잠시뿐, 호랑이 아가리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있는 듯한 두려운 현실이 두 사람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오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달이 뜨는 밤마다 이토록 목숨을 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밤은 며느리의 임기응변으로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지만, 꼬리가 길면 결국 밟히는 법. 언젠가는 저 서슬 퍼런 시어머니의 눈에 띄어 두 사람 모두 피투성이가 된 채 멍석에 말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한참 동안 천장만 노려보며 거친 숨을 고르던 사내가 마침내 무거운 침묵을 깨고 여인의 두 손을 으스러지도록 꽉 쥐었다.
"부인, 방금 보시지 않았소? 이 숨 막히는 집구석은 그토록 어여쁜 부인이 숨죽이고 살 곳이 절대 못 되오. 저리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서슬 퍼런 시어미 밑에서, 언제까지 무덤 속 시체처럼 청춘을 갉아먹으며 살 작정이오? 나를 따라나서시오. 당장 이 지옥 같은 곳을 떠나 나와 함께 가십시다. 비록 으리으리한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입혀주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산속에서 산짐승처럼 자유롭게 뛰놀며 부인에게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고, 내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부인의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평생을 아끼고 사랑해주겠소."
사내의 단호하고도 절절한 제안은 여인에게 너무도 달콤하고 황홀한 구원의 동아줄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뼛속까지 두렵고 무서운 파멸의 초대장이기도 했다. 조선 천지에서 양반가의 과부가 사내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한다는 것은 가문에 씻을 수 없는 더러운 먹칠을 하는 최악의 패륜이었으며, 만에 하나 추노꾼들에게 꼬리를 밟혀 잡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두 사람 모두 가차 없이 멍석에 말려 몽둥이찜질을 당해 맞아 죽을 중죄 중의 중죄였다. 여인은 사내의 손을 잡은 채 무의식적으로 방구석에 고스란히 놓인 낡고 작은 반닫이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서랍 깊은 곳에는 자신의 신분과 과거를 잔인하게 옭아매고, 끊임없이 자결을 강요하던 그 끔찍한 은장도가 차갑게 식어 들어 있었다.
'양반가의 청상과부로 남아 평생을 시어머니의 감시 아래 시체처럼 숨죽이고 향냄새나 맡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가문의 수치라 손가락질을 받으며 이름 없는 촌부의 아낙이 될지언정, 저 사내와 뜨거운 피를 나누고 웃고 떠들며 진정 사람답게 살아볼 것인가...'
그녀의 머릿속을 맴도는 선택의 번뇌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이미 지난 폭풍우 치던 밤, 사내의 품에 안겨 은장도를 방바닥에 미련 없이 내던져버린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단호한 결정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음과 허울뿐인 명예의 상징인 은장도를 버리고, 생명의 온기와 펄펄 끓는 본능인 사내를 택하지 않았던가. 여인은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애타게 손을 내밀고 있는 사내의 단단하고 미더운 두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지요. 도련님과 함께라면, 그곳이 가시밭길이든 천 길 낭떠러지든 지옥불이든 조금도 두렵지 않사옵니다. 이 끔찍하고 지옥 같은 무덤을 떠나, 제 남은 생의 모든 순간을 도련님 곁에서 사람답게 숨 쉬며 살겠사옵니다."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여인의 비장하고도 아름다운 결단에, 사내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하고 벅찬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두 팔로 번쩍 안아 올렸다. 여인은 지체할 틈 없이 재빨리 방구석의 작은 보따리를 꺼내어 꼭 필요한 옷가지 몇 벌과 비상시 노잣돈으로 쓸 패물 약간만을 단단히 챙겨 묶었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반닫이장 안에 깊숙이 쑤셔 박아두었던 그 서늘한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잠시 칼집의 매화 무늬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그 서늘하고 잔인한 칼날을 뽑아 방 한가운데 놓인 자신의 화장경대 한가운데에 내리찍듯 깊숙이 박아 넣었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갈라지며 은장도가 경대에 꼿꼿하게 꽂혔다. 그것은 자신을 평생토록 억압하고 괴롭혔던 가문의 규율과 헛된 정절에 대한 완전하고도 통쾌한 결별 선언이자, 죽었다 깨어나도 두 번 다시 이 차가운 과부의 방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스스로를 향한 맹렬하고 굳은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제 모든 미련을 버렸습니다. 정말로 떠나는 겝니다."
사내가 여인의 작은 손을 자신의 큰 손으로 단단히 감싸 쥐고 부서진 방문을 미련 없이 나섰다. 칠흑 같은 밤하늘 한가운데 떠오른 둥근 보름달이 두 사람의 발밑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춰주며 그들의 앞길을 축복하는 듯했다. 사내는 익숙하고 솜씨 좋은 동작으로 여인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고, 그토록 높고 견고해 보이던 양반집의 흙담장을 단숨에 훌쩍 넘어 뛰어내렸다. 철창 같은 담장 밖, 낯선 바깥세상의 흙을 밟는 그 순간, 여인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이슬 맺힌 풀벌레 냄새와 맑고 상쾌한, 온전한 자유의 밤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억눌려 있던 수년간의 고통스러운 한숨과 핏빛 눈물이 이 밤바람에 실려 저 멀리 아득하게 흩어지며 영원히 사라지는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가 전해지는 두 손을 굳게 맞잡은 채, 인적 없는 험한 산길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록 쫓기는 신세로서 험난하고 가시밭길 같은 도망자의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언정, 서로를 의지하며 나아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허공을 나는 새의 깃털처럼 한없이 가벼웠다. 굽이치는 산길을 돌아설 때마다, 그들의 등 뒤로 웅장하지만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차갑고 끔찍했던 양반집 안채의 낡은 기와지붕이 점점 작아지며 이내 완전한 어둠 속으로 먹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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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야담, 어떠셨나요? 서늘한 은장도를 내던지고 뜨거운 사랑과 생명을 선택한 여인의 용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재미있게 들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따뜻한 댓글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응원이 큰 힘이 됩니다. 다음 시간에도 흥미진진하고 은밀한 옛날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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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비 내리는 깊은 밤, 굳게 닫힌 한옥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오는 산만 한 덩치의 험상궂은 사내와, 방 안에서 소복을 입은 채 은장도를 들고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아름다운 젊은 과부의 모습, 두 사람 사이의 극적인 긴장감, 달빛과 번개 불빛의 극명한 대비, 드라마틱한 조명, 16:9
A dramatic scene in the Joseon Dynasty on a rainy night, a huge intimidating man roughly opening the door of a traditional Hanbok room, a beautiful young widow in white mourning clothes terrified holding a silver knife inside the room, extreme tension between the two, dramatic contrast of moonlight and lightning, colored pencil drawing, highly detailed, dramatic lighting, 16:9, no text --ar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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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복을 입은 조선시대 젊은 과부가 차가운 한옥 방안에 홀로 앉아 은장도를 바라보며 슬픔에 잠겨있는 모습, 쪽진 머리, 쓸쓸하고 어두운 분위기, 달빛이 비치는 창호지 문, 16:9
A young Joseon Dynasty widow in white mourning clothes sitting alone in a cold traditional Korean room, looking at a silver knife with sadness, chignon hair, lonely and dark atmosphere, moonlight shining through paper door, watercolor painting, beautiful, detailed, 16:9, no text --ar 16:9
조선시대 한옥 안채, 나이 든 시어머니가 차가운 표정으로 젊은 며느리에게 은장도를 건네는 모습, 한복,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 16:9
An old mother-in-law with a cold expression handing a silver knife to a young daughter-in-law in a traditional Joseon Dynasty house, wearing Hanbok, solemn and heavy atmosphere, watercolor painting, masterpiece, 16:9, no text --ar 16:9
은장도의 칼날을 응시하는 여인의 얼굴 클로즈업, 슬픔과 체념이 섞인 표정, 시퍼런 칼날에 비친 여인의 얼굴, 16:9
Close-up of a young woman's face looking at the blade of a silver knife, expression of sadness and resignation, her face reflected on the sharp blue blade, watercolor painting, delicate, 16:9, no text --ar 16:9
밤하늘의 둥근 달, 고요하고 적막한 조선시대 기와집 안채 풍경, 외롭고 처량한 분위기, 16:9
Round moon in the night sky, quiet and lonely scenery of a traditional Joseon Dynasty tile-roofed house, lonely and desolate atmosphere, watercolor painting, aesthetic, 16:9, no text --ar 16:9
방구석에 무릎을 안고 웅크리고 앉아 우는 소복 입은 여인, 촛불이 흔들리는 방안, 16:9
A woman in white Hanbok sitting curled up in the corner of the room hugging her knees and crying, flickering candle light in the room, watercolor painting, emotional, 16:9, no text --ar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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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조선시대 밤, 기와집 마당의 나무가 바람에 크게 흔들리는 풍경, 번개, 16:9
A stormy night in the Joseon Dynasty, trees in the yard of a tile-roofed house swaying heavily in the wind, lightning, watercolor painting, dynamic, 16:9, no text --ar 16:9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굳게 닫힌 한옥 방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순간, 부서진 문살, 번개 불빛, 역광, 16:9
A huge man breaking into a tightly closed traditional Korean room door, broken wooden frames, lightning flash, backlight, watercolor painting, dramatic action, 16:9, no text --ar 16:9
방 안으로 들어온 젖은 옷차림의 거친 사내, 상투머리, 야성적인 모습, 두려움에 떠는 여인의 시선, 16:9
A rough man in wet clothes entering the room, topknot hair, wild appearance, viewed from the perspective of a trembling woman, watercolor painting, intense, 16:9, no text --ar 16:9
벽에 기대어 은장도를 목에 겨누고 있는 젊은 과부,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하는 표정, 소복, 16:9
A young widow leaning against the wall aiming a silver knife at her own neck, crying with a fearful expression, white Hanbok, watercolor painting, expressive, 16:9, no text --ar 16:9
여인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거대한 사내의 뒷모습과 방어하는 여인의 대치 상황, 팽팽한 긴장감, 16:9
The back of a huge man slowly approaching the woman and the defending woman, standoff situation, tight tension, watercolor painting, cinematic, 16:9, no text --ar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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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사이로 비치는 달빛 아래 드러난 사내의 강인하고 다부진 가슴팍, 젖은 옷자락, 생명력, 16:9
Strong and muscular chest of a man revealed under the moonlight shining through the clouds, wet clothes, vitality, watercolor painting, highly detailed, 16:9, no text --ar 16:9
사내가 부드럽게 여인의 손을 감싸 쥐며 은장도를 빼앗는 모습, 투박한 손과 가녀린 손의 대비, 16:9
The man gently holding the woman's hands and taking away the silver knife, contrast between rough hands and delicate hands, watercolor painting, emotional touch, 16:9, no text --ar 16:9
바닥에 버려진 은장도, 달빛이 비치는 방바닥, 16:9
A silver knife thrown on the floor, moonlight shining on the floor, watercolor painting, symbolic, 16:9, no text --ar 16:9
스스로 옷고름을 푸는 여인과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사내, 억압에서 벗어난 해방감, 로맨틱, 16:9
A woman untying her own Hanbok ribbons and the man looking at her affectionately, sense of liberation from oppression, romantic, watercolor painting, beautiful, 16:9, no text --ar 16:9
서로를 뜨겁게 껴안는 사내와 여인 실루엣, 달빛이 비치는 부서진 문지방, 폭풍우 치는 밖의 풍경, 16:9
Silhouettes of the man and woman passionately embracing each other, moonlight shining on the broken threshold, stormy scenery outside, watercolor painting, romantic and dramatic, 16:9, no text --ar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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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이 부서진 방문을 통해 환하게 들어오는 방안, 평화로운 아침 풍경, 16:9
Morning sunlight shining brightly into the room through the broken door, peaceful morning scenery, watercolor painting, bright and warm, 16:9, no text --ar 16:9
잠든 사내의 거친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는 여인의 손길, 애틋한 시선, 16:9
The woman's hand carefully stroking the sleeping man's rough cheek, affectionate gaze, watercolor painting, tender moment, 16:9, no text --ar 16:9
마주 보고 앉아 미소 지으며 대화하는 두 남녀, 따뜻한 분위기, 조선시대 방안, 16:9
The man and woman sitting face to face, smiling and talking, warm atmosphere, traditional Joseon room, watercolor painting, soft, 16:9, no text --ar 16:9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사내의 뒷모습과 마루에서 아쉬운 듯 바라보는 여인, 아침 안개, 16:9
The back of the man jumping over the wall and the woman looking at him with regret from the porch, morning mist, watercolor painting, cinematic, 16:9, no text --ar 16:9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방바닥의 은장도, 새로운 시작을 암시, 16:9
The silver knife on the floor receiving morning sunlight, implying a new beginning, watercolor painting, symbolic, 16:9, no text --ar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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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화색이 도는 여인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보는 시어머니, 긴장감 넘치는 마루, 한복, 16:9
The mother-in-law glaring with sharp eyes at the woman whose face looks blooming and lively, tense porch, Hanbok, watercolor painting, expressive, 16:9, no text --ar 16:9
둥근 보름달이 뜬 밤, 담장을 넘어 마당으로 내려오는 사내, 달빛 조명, 16:9
A night with a full round moon, the man coming down to the yard over the wall, moonlight illumination, watercolor painting, mysterious, 16:9, no text --ar 16:9
방 안에서 뜨겁게 재회하며 포옹하는 두 사람, 애틋함, 16:9
The two people passionately reuniting and embracing in the room, affectionate, watercolor painting, romantic, 16:9, no text --ar 16:9
방문 앞까지 다가온 시어머니의 그림자가 창호지에 비친 모습,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식은땀을 흘리는 여인, 극도의 긴장감, 16:9
The shadow of the mother-in-law approaching the door reflected on the paper, the woman sweating under the blanket in the room, extreme tension, watercolor painting, thriller mood, 16:9, no text --ar 16:9
병풍 뒤에 숨어서 칼자루를 쥐고 숨죽이고 있는 사내, 긴박한 상황, 16:9
The man hiding behind a folding screen, holding the hilt of his sword and holding his breath, urgent situation, watercolor painting, intense, 16:9, no text --ar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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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손을 굳게 맞잡고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두 남녀, 결단, 16:9
The man and woman holding hands firmly and nodding with resolute expressions, determination, watercolor painting, emotional, 16:9, no text --ar 16:9
경대 위에 은장도를 깊숙이 꽂아두고 돌아서는 여인의 모습, 과거와의 결별, 16:9
The woman deeply inserting the silver knife into the mirror stand and turning away, parting with the past, watercolor painting, symbolic action, 16:9, no text --ar 16:9
봇짐을 메고 사내의 손을 잡은 채 담장을 넘는 여인, 달빛이 비치는 밤, 자유, 16:9
The woman carrying a small bundle and jumping over the wall holding the man's hand, moonlit night, freedom, watercolor painting, dynamic, 16:9, no text --ar 16:9
달빛 아래 산길을 향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 멀어지는 기와집, 16:9
The backs of the two people walking hand in hand towards the mountain path under the moonlight, fading tile-roofed house, watercolor painting, hopeful, 16:9, no text --ar 16:9
새벽동이 트는 첩첩산중을 걷는 두 남녀의 희망찬 실루엣, 16:9
Hopeful silhouettes of the man and woman walking in the deep mountains as dawn breaks, watercolor painting, beautiful landscape, 16:9, no text --ar 16:9